웃기지만 슬픈 ‘자본주의 체코’ - 거지의 오페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호 14면

1960년대 동유럽 영화계가 르네상스를 맞이했을 때 그 중심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있었다. 그러나 68년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침공으로 끝장이 나고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66년 ‘가까이서 본 기차’로 주목받은 이리 멘젤은 가혹한 검열 속에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영화와 연극 분야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바츨라프 하벨의 희곡을 원작으로 91년에 연출한 ‘거지의 오페라’는 89년의 ‘벨벳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이후의 체코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영화다.

★★★★ 감독 이리 멘젤 주연 바르보라 레이츠너로바ㆍ루돌프 흐루신스키 러닝타임 98분

범죄 조직의 두목 피첨은 부하와 여자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매키스가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르자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처음에는 딸을 이용해 매키스를 곤경에 빠뜨리려 하는데 딸이 그만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까지 해버리자, 경찰서장 로킷을 끌어들인다. 경찰은 마땅히 매키스와 함께 피첨 조직까지 일망타진해야 하지만, 로킷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등장인물들 모두는 자기 이익에 따라 속고 속이며,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한다.

그래서 피첨의 집과 로킷의 경찰서는 한집처럼 붙어 있고, 피첨이 지하세계에서 거둔 수입은 시의 수입으로 환원된다. 악한 자가 아니라 의리의 사나이 필치처럼 조직의 생리도, 세상의 게임의 법칙도 모르는 자가 제거당하는 세상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이익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겉으로는 평화롭게 공존해간다.

이리 멘젤은 이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공산주의 체제의 검열을 피하려다 동유럽 영화의 특징이 되어버린 은유와 상징에다 연극적인 연출을 더해 유머와 풍자 넘치는 소극으로 만들어냈다. 그 웃음 속에서 관객이 불현듯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감독의 소망 아닐까?
이 감독의 또 다른 작품 ‘가까이서 본 기차’ ‘줄 위의 종달새’도 함께 챙겨 보면 금상첨화!

---
중앙대에서 영화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경욱씨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표는 필자가 매긴 영화에 대한 평점으로 ★ 5개가 만점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