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레슬링 안천영|갈비뼈 부상 딛고 불꽃 투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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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68년 고원의 나라 멕시코에서 벌어진 제19회 여름올림픽에서 한국은 은메달 1개(지용주)·동메달 1개(장정길)를 모두 복싱에서 따내 1백8개국 중 36위를 마크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국내선수로 메달리스트 못지 않게 각광받은 선수는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57㎏급에서 아깝게 탈락한 안천영(전 국가대표감독)이다. 국내 언론들은 『불굴의 투지로 일어선 인간만세』 『졌지만 이겼다』는 등 최대의 찬사로 안 선수를 극찬했다.
당시 25세의 혈기왕성한 해병대 용사 안천영은 초반경기를 휩쓸며 한국에 메달 꿈을 안겼다.
3차 전에서 68년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인 터키의 오스카 부카야를 천신만고 끝에 판정으로 이기면서 안천영은 한국선수단의 영웅으로 혜성같이 등장했다.
금메달은 따 논 당상.
그러나 불운이 찾아들었다. 부카야와의 경기도중 안아 넘기기를 시도하다 부카야의 둔중한 엉덩이가 안천영의 가슴에 떨어지면서 왼쪽 갈비뼈 2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전치 2개월. 코칭 스태프와 안천영은 눈앞이 캄캄했다.
안천영은 경기가 끝난 후 급히 병원에 후송됐다.
이튿날 벌어지는 4차 전 상대는 약체 그리스 선수. 안천영은 4차 전(당시는 벌점제)만 이기면 금이냐, 은이냐, 메달 색깔만 가리는 일만 남아있었다.
더구나 그리스선수는 안천영이 이제까지 져본 적이 없는 약체. 이 같은 천재일우의 기회에 2개월 중상을 입었으니 선수단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안천영은 병원에만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안은 그 다음날 안광렬(현 전북협회 명예회장) 감독의 출전 포기권유를 뿌리치고 몰래 병원을 빠져나가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꿈에 그리던 메달이 눈앞에 있었어요. 가슴에 널빤지를 대고 붕대를 감은 뒤 병원의 감시를 피해 경기장에 갔습니다. 경기가 임박해 내가 나타나자 감독을 비롯한 동료들은 죽으려고 환장 했느냐며 안 된다고 펄쩍 뛰었어요. 나는 죽어도 매트 위에서 죽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선수 복을 갈아입고 매트에 나섰다.
결과는 3-0 완패. 기술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당시 메달을 따기 위해선 이겨야만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먼저 적극적인 공격에 들어갔어요.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상대가 파놓은 함정에 결국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상대 공격을 기다리다 적당히 맞받아 쳤으면 승산이 있었을 텐데….』
말끝을 잇지 못하는 안씨의 회고.
안천영은 집념의 재기 끝에 그 다음해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첫 은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올리며 올림픽 메달의 한을 씻는데 성공했다.
한편 복싱 리이트 플라이급에 출전한 지용주는 멜버른올림픽의 송순천에 이어 또다시 심판텃세로 금메달을 빼앗기고 은메달에 머물러야 했다.
파죽의 연승으로 황색 돌풍을 몰고 온 지용주는 결승에서 베네수엘라의 로드리게스와 한판을 벌이게 됐다.
주심은 남미 출신. 시종 공세를 펼친 지는 당시 컴퓨터 채점이 없던 때이긴 했으나 결과는 억울한 판정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든 화려하게 올림픽 무대에 등장한 지는 72년 뮌헨올림픽을 겨냥, 스파링에 땀을 흘렸으나 그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화려했던 시절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사회 적응에 실패했던 원주 출신의 지는 외판원 등으로 전전하던 86년 어느 날 동네불량배와 시비 중 칼에 찔려 불귀의 객이 되고만 것이다. <방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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