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맞는「신발」신어야 잘 뛰죠"|말굽에 편자 달기 5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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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육상선수에게 발에 맞는 운동화가 기본이듯 말도 올바른 편자를 달아야 잘 뛸 수 있다.
말굽을 제대로 깎아내고 거기에 딱 맞는 편자를 대는 일은 속도가 생명인 경주마에게는 특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경기도 과천 경마장에 근무하는 한국마사회 소속 장제사 이규찬씨(64)는 50년을 말의 발굽에 맞는 편자를 신겨온 국내 최고의 전문가다.
발굽을 깎고, 편자를 굽에 맞게 다루고, 못으로 발굽에 박는 3단계로 이뤄진 장제 일은 오랜 경험과 종합적인 판단, 세심한 손질과 기술이 요구되는 전문직이다.
시속 60∼70km로 코너를 돌아야 하는 경주마는 종이 한 장의 말굽 두께 차이로도 승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편자갈이는 우선 보행 검사를 통한 장제 판단에서 시작된다.
높이가 7∼8cm 정도인 말발굽은 1개월에 7-8mm정도 자란다.
발굽의 안쪽이 바깥쪽보다 성장속도가 빠른데다 그사이 편자가 닳기 때문에 일직선으로 걸어야할 말이 약간 팔자걸음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말굽안팎의 높이를 같도록 할 뿐 아니라 앞 뒷발에 따라 달라야하는 말굽 자체의 경사도를 어느 정도로 조정할 것인가를 걸음걸이만 보고 판단해내야 한다. 조수가 잡고있는 말의 한쪽 다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놓고 커다란 칼로 내리쳐 굽을 깎아내는 일은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말이 갑자기 발을 움직이면 무거운 칼날이 세 겹 짜리 천막 천으로 만든 작업복을 자르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의 왼 무릎 위에는 10여 곳의 기다란 상처가 훈장처럼 남아있다.
칼날이 파고드는 깊이와 각도를 말굽과 닿아있는 무릎을 통해 느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안전대책을 세우기는 어렵다.
다음 단계에선 미리 준비된 편자를 불에 달구고 망치로 때려 발에 딱 맞도록 조정한다.
발굽의 두꺼운 부분과 얇은 부분을 가르는 흰 선이 못을 치는 구멍과 일치하도록 정확히 편자를 다루는 대장장이 작업은 특히 노련한 기술을 요한다. 이 단계가 정확해야 다음 단계에서 이 흰 선에 딱 붙여서 바깥 방향으로 뚫고 나가도록 못을 칠 수 있다.
못이 흰 선에서 멀어지면 편자가 쉽게 빠지게 되고, 안쪽으로 침범하면 연한 살을 다쳐 말이 다리를 절게된다.
이모든 작업은 그가 한 명의 조수와 함께 하면 40분 정도 걸린다.
『장제는 되도록 빨리 끝마쳐주는 것이 좋습니다. 오래 끌면 스트레스를 방은 말이 흥분해서 난동을 부리기 쉽습니다.
말은 대체로 사람을 잘 따르고 온순한 동물이지만 고집이세고 까다로운 녀석이 있게 마련이지요.
눈의 흰자위가 유난치 크거나 얼굴의 흰줄무늬가 코를 타고 똑바로 내려오지 않고 옆쪽으로 흘러버린 놈 중에 악 병마, 즉 성질이 나쁜 말이 많습니다.
말의 습성은 원산지에 따라서도 차이가 크다.
『호주 산 말은 말썽을 피우는 경우 때려서 혼을 내주면 다음부터는 사람을 무서워하고 말을 잘 듣지만 미국산 말은 때리면 더 성질을 부리고 끝까지 대항하기 때문에 그저 어르고 달래야 합니다.』
그가 오늘과 같은 전문가가 된 것은 오랜 경험 뿐 아니라 끊임없이 알려고 연구하는 노력의 소산이다.
선친 이맹조씨는 구한말 대구에서 당시의 교통수단이던 마차를 끄는 짐말의 편자를 갈아주던 장제사였다.
5형제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주했고 15세의 나이로 그곳 청진경마장에 견습 장제사로 들어갔다.
짐말보다는 경주마의 장제가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한 부친이 안면이있는 일본인 장제사에게 그를 도제로 맡겼던 것이다.
『지금은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부분이지만 아주 엄격했어요. 온종일 조수로 실습한 뒤 저녁이면 하나씩 설명을 해가며 몇 시간씩 가르쳤어요. 조금이라도 틀리면 망치나 쇠꼬챙이 같은 걸로 머리·어깨 가리지 않고 마구 내리쳤지요. 월급은 물론 없고 선생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허락 없이는 외출도 하지 못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명예심이 강해 눈에 들지 않으면 아예 제자로 키우지도 않았던 게 당시의 풍습이었지요.』
나이가 많은 일본선생이 우에노라는 다음 선생에게 그를 인계했고 도합 3년여의 수업 끝에 그는 해방을 맞아 우에노 선생이 하던 신실동 경마장의 장제실을 물려받았다.
그 뒤 49년엔 기갑연대 기병대에 장제사로 입대했고 54년 제대와 함께 문을 연 뚝섬경마장에 정착, 지금의 과천까지 함께 옮겨오게 됐다.
그는 한동안 자신의 말을 가지고 마주·기수·조교사·장제사의 일을 한꺼번에 한 적도 있으나 경주마가 조랑말에서 수입 개량마로 바뀌면서 말을 다 팔아버리고 본업인 장제사에만 전념하게 됐다.
66년쯤부터 동업을 하게된 선배 장제사 김현철씨(작고)가『조-교사 시험을 치러 그 길로 나가는 편이 수입이 좋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의리 때문이었지요. 정이 많이 든 선배를 혼자만 힘든 일을 하게 남겨두기가 인간적으로 미안했어요. 돈에는 원래 별로 관심이 없었고요.』
그는 그 동안 10여명의 제자를 키워내 지금 마사회 장제사 21명은 모두 자신의 제자거나 제자의 제자다.
『장제는 단순치 많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만으로는 기술이 느는데 한계가 있어요. 이 바닥에서 뭔가 이뤄보겠다는 목표를 실정하고 스스로 연구하는 게 중요하지요.』
88년에 정년 퇴직한 이후에도 촉탁직원의 신분으로 장제 일을 계속하고 있는 그는 이것이 본래 내가 해야하는 일이려니 여겼고 내가 좋아서 한일이니 후회 같은 건 물론 없다고 말한다. 은행대리로 있는 장남을 포함, 1남3여를 출가시킨 그는 막내딸·부인과 함께 서울 성수동 장미아파트에서 살고있다.<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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