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는 그만 … 바둑으로 '외길 수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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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목진석 9단의 기세가 무섭다. 8일 현재 23전 21승 2패. 다승 1위에 승률(91%)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승리 중엔 15연승도 있고 전자랜드배 백호부 우승도 있다. 14세 때 국가대표로 나가 대륙의 강자 녜웨이핑(衛平)을 꺾으며 '괴동(怪童)'이란 별명을 얻었던 목진석. 그는 2000년 KBS바둑왕전에서 무적 이창호 9단을 2대 1로 꺾고 우승하며 절정의 기량을 보였으나 2002년 기성전과 2004년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이 9단에게 연속 패배한 뒤 타이틀 무대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후 목진석은 중국어와 영어에 몰두하고 이성교제에다 음반도 내는 등 바둑판 밖의 세계에 더 관심을 쏟는 듯 보였다. 그러나 8일 한국기원에서 만난 목진석은 뜻밖의 말을 했다."한 우물을 파는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한 길을 꾸준히 가는 것도 뜻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 말 속에 연전연승의 해답이 숨어있었다. 만 27세가 된 괴동이 방황(?)을 끝내고 다시 바둑판 앞으로 돌아온 것이다.

- 지금 다승 승률 1위다. 연승부문(15연승)까지 현재로는 기록부문 3관왕이다. 왜 이렇게 성적이 좋아졌나.

"대진운이 좋았고 예선대국이 많았다. 그러나 기록은 연말까지 계속 이어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본다."(이 기록이 계속 이어진다면 대부분의 타이틀이 목 9단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또 요즘은 신예들이 강해 정상급조차 예선 탈락이 비일비재라 예선이 더 지옥이란 얘기도 흔하게 들린다.)

- 컨디션이 좋아졌나. 실력이 늘었나.

"사실은 요즘 마음이 편안하다. 여자친구와도 헤어졌고… 바둑 외의 다른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헬스와 테니스, 그리고 바둑공부. 이렇게 단조로워졌다. 바둑에 집중력이 높아졌는지 잘 이기고 있고 가속도가 붙고 있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보여준 건 아무 것도 없다."

-지난 몇 년간의 슬럼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조급증 탓이라고 본다. 성적은 떨어지는데 후배들은 단숨에 치고 올라와 우승컵을 쓸어갔다. 그래서 초조감을 느꼈는데 사실 조급증은 승부의 상극이었다. 근래 친구인 안조영 9단이 10단전에서 첫 우승을 거두는 것을 보며 느끼는 게 많았다. 안조영은 실패하면서도 묵묵히 수련했는데 그처럼 하면 나에게도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 믿고 있다."

-99년 기성전에서 이창호 9단에게 2대 0으로 졌고 2000년엔 KBS 바둑왕전에서 2대 1로 이겨 우승했다. 그러나 이후 두 번의 대결에선 연패를 당했다. 목 9단의 흥망성쇠는 이창호 9단과 밀접해 보인다.

"첫 만남에선 배운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둑왕전은 속기대회인데다 행운이 겹쳐 승리했는데 아무튼 그때 내 자신감은 절정이었다. 2002년 기성전은 정말 아쉬웠다. 2대 2까지 갔고 마지막 대국에서 다 이긴 바둑이었으나 역전당했다. 이때의 상처는 말할 수 없이 커서 한동안 정신을 못차렸다. 2004년엔 처음 세계무대 결승에 나가(LG배 세계기왕전) 이 9단과 만났으나 3대 1로 졌다. 세계대회 우승컵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상처도 커 이후 영 바둑이 되지 않았다. 내리막길이었다."

-목 9단은 취미도 다양하고 외국어에도 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바둑 외길 인생이 지루했나.(목진석은 '중국통'이 됐다. 중국리그에서 5년간 생활했고 중국기자들이 한국기사를 인터뷰할 때 통역도 하고 노래도 잘해 음반도 냈다.)

"바둑판 밖의 인생에 많은 호기심을 느꼈다. 재미도 있었다. 그게 승부에서 진 후유증일 수도 있고 방황이라면 방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바둑만 생각한다.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일인자가 되고 정상에 오른다면 더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길을 꾸준히 가는 것은 뜻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40세 명인이 진짜 명인이란 말이 있다. 인생의 경험을 바둑에 접목한 진짜 명인 말이다. 그걸 꿈꾸는 것인가.

"40세 명인이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론 어려운 낭만적인 얘기가 아닐까. 바둑이 더욱 속기화되고 집중력.체력.초읽기 승부가 요구되는 요즘엔 더욱 힘든 얘기다. 그 점에서 나는 40세 명인을 실제 이룬 조훈현 9단과 그게 가능한 이창호 9단, 그리고 중국의 위빈(兪斌) 9단을 존경한다. 바둑에 대한 열정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 사람들이다."

-속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바둑의 깊이를 살리려면 일본처럼 이틀바둑도 필요하고 그래야 40세 명인도 나온다. 한국은 요즘 속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런 추세는 팬 서비스 측면에선 좋겠지만 세계대회에 나가 중국기사들을 상대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중국통으로서 한국 대 중국을 비교한다면.

"신예는 중국이 더 세다. 허리층도 중국이 더 두텁다. 그러나 최정상급은 한국은 이창호-이세돌 9단이고 중국은 구리-창하오 9단을 들 수 있는데, 이 비교에선 한국이 더 강해 보인다. 총 전력에선 5대 5. 그러나 앞날은 중국 쪽이 더 밝다고 생각한다."

-올해의 소망이 있다면.

"다시 타이틀 무대에 복귀하는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목진석은 ▶1980년 서울 생. 94년 프로입문▶98년 신인왕전 우승▶99~2002년 기성전 준우승▶2000년 KBS바둑왕전 우승▶2004년 LG배 세계기왕전 준우승▶2005년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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