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며시 꼬리감춘 무소속 출마 규제/문일현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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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당원의 무소속 출마와 파렴치범의 국회의원후보 출마를 규제하겠다던 민자당이 방침결정 하루만인 17일 이를 슬그머니 철회했다.
민자당은 문제의 조항들을 철회하면서 『지방의회 선거에서 드러난 의원 자질문제와 이당 저당을 넘나드는 정치꾼들로 인한 혼탁 분위기를 바로 잡자는 취지였으나 국민의 참정권 제한 시비가 일 소지가 있어 철회키로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위헌의 소지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민자당이 뒤늦게 깨달았다니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이같은 발상의 동기에서부터 방침결정 과정,그리고 철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석연치 않은 대목들이 너무 많다.
3당통합에 따른 3계파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고 14대 공천과정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면 이들이 무소속으로 출마,여권 내부경쟁이 치열할 것이라는 사실을 민자당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다.
때문에 당원의 무소속 출마를 규제하겠다는 발상은 여권 후보 난립을 막아 집권 여당이 차기 총선에서 득을 보겠다는 얄팍한 저의에서 비롯됐다는 비난을 민자당은 면키 어렵게 됐다.
이뿐만 아니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든 정당원의 무소속 출마규제가 위헌성이 있다는 사실을 민자당이 몰랐겠느냐는 점이다.
평범한 시민들도 공민권을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법과 자신의 의사에 따라 출마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명분이 됐든 정당이 이를 법으로 규제한다는 것은 정략을 위해선 법을 자의적으로 고칠 수 있다는 「초법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내로라하는 율사들과 전문가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리고 있는 민자당이 이를 모르고 추진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지적들이 많다.
여당 공천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말 안들으면 혼낼 수 있다」는 엄포용의 효과가 있었다는 당의 변명에는 더 할 말이 없어진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법질서 확립과 민주화를 염불처럼 외는 집권 여당이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이같은 초법적 발상을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데 있다. 적어도 권위주의 통치하에서나 가능한 발상을 집권 여당의 수뇌부가 손쉽게 해낸다면 그것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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