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오픈' 흑, 허공을 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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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오픈'

<세계바둑오픈 결승 1국>
○ . 창하오 9단  ● . 이창호 9단

제4보(48 ~ 63)= 흑▲의 강경한 절단은 패도적이다. 중앙에서 백의 발목을 잡아 우변으로 파고들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게 첫번째 목적이지만 그 사나운 기세에서 한바탕 광풍으로 판을 휘젓고 싶은 야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창호 9단이 이런 수를 둔다는게 놀라움을 준다.

창하오(常昊) 9단은 48, 50으로 가볍게 비킨다. 과거의 창하오는 스스로 도발하고 스스로 무너졌으나 오늘의 창하오는 이처럼 유연해졌다. 가혹한 시련이 그를 이만큼 키운 것일까.

흑은 51로 뚫고 나간다. 수비를 외면한 데 대한 당연한 보복이다. 그러나 백도 52부터 58까지 아주 깨끗하게 우변을 돌파했다. 순식간에 백돌이 우수수 우변에 쏟아졌는데 이 수순은 거의 외길이다. 흑▲가 허공을 쳤다는 느낌이 점점 확연해지고 있다. 그렇다. 흑▲의 진정한 목적은 우변 지키기였는데 이를 간파한 창하오가 역으로 치고 나왔다.

"주고 받았지만… 백이 잘된 모습입니다"라고 조한승 9단은 말한다. 이 온건한 청년은 언행이 항시 부드럽지만 이 장면에선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실패를 직감한 이창호 9단은 잠시 묵념을 하는 듯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59로 격렬히 붙여간다. 흑▲에 이어 계속되는 이창호의 흔들기다. 62로 뻗자 63.

'참고도'처럼 된 것에 비해 실전이 낫다고 볼 수는 없다. '참고도'처럼 두고 A로 파고드는 게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고도'는 안정적이고 실전은 혼란이 잉태되어 있다. 비세의 이 9단은 혼란을 원하고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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