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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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더구나 삵의 벼랑끝에 선 사람을 지대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나 신앙의 힘일 수도 있다.
한국화가 허승욱(43)에게 있어 그림은 「예술」이기 이전에 「생명」이다. 그는 삶의 막바지에서 그림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의 새로운 삶을 일궈왔다.
『저는 단순히 「화가」가 아닙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껏 살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붓끝에 제 삶의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허씨는 지난 72년 군복무 중 폭발사고로 전신마비에 언어장애까지 겹친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맸었다.
그는 1년 가까이 혼신의 투병끝에 겨우 반신의 기능만을 회복한 채 제대했다. 오른쪽 팔과 다리는 거의 마비됐으나 겨우 걸을 수는 있었다.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졌다지만 남달리 튼튼하던 육신이 하루아침에 불구가 되었으니…. 그저 운명 탓으로 돌리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지요.』
제대 후 서울 종암동 집으로 돌아온 그는 주변의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측은한 눈길마저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을 피해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남동생을 데리고 경기도 남양주군 천마산 자락으로 숨어 들어갔다.
마을에서 1㎞쯤 떨어진 산기슭에 암자 같은 벽돌집을 짓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자연과 더불어 「도인」처럼 생활했다.
『「위기무실」(자신에게 충실하라는 뜻. 조선조 숙종때 윤전의 글)을 좌우명으로 삼아 자연의 묘리를 터득하려 노력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붓과 먹을 구해 떨리는 왼손으로 한 일이) 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화법의 일획정신은 바로 유교의 일관(일이관지)정신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사신의 정신수양을 위해 시작한 한 일자 긋기는 결국 그를 서예의 길로 끌어들였다.
기실 허씨는 동년배들에 비해 상당한 한학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전북 남원지방의 유명한 유학자 허극 선생의 손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동네 인근에 은둔해있던 한학자 김영철 선생에게서 고교 졸업 때까지 한학을 배웠다.
그는 1년 동안 한 일자만을 쓰며 일 획정신을 터득하려했다.
어느 정도 필력이 붙은 그는 본격적인 서예 독학에 들어갔다. 안진경의 명필 「다보탑비」 등을 수없이 임서하며 글씨를 연마했다.
『처음엔 손이 떨려 제대로 글씨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글씨를 쓰는동안에는 정신이 맑아지고 밤낮없이 저를 괴롭히던 좌절과 분노가 없어졌습니다.』
천마산 칩거생활 6년 동안 그는 대먹 수십개를 갈아 없앨 정도로 글씨에 정진했다.
그동안 그의 서예수준은 상당히 발전, 지난 78년엔 그의 실력을 인정한 서예가 윤길중·임창순씨 등의 도움으로 예총회관에서 첫 서예전을 열었다.
서예로 새로운 삶의 빛을 찾은 허씨는 6년간의 은둔생활을 끝내고 이 세상으로 나와 서예가 여초 김응현씨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허씨에게는 또 하나의 변신이 운명처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79년말 정처 없는 대만 유학 길에 올랐다. 뚜렷한 계획도 없이 중국의 서화를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떠났다.
고궁박물관에서 우연히 원로황가 전부씨를 만나 그의 집에서 사군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씨는 상해 미술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거장 오창석에게 배운 대가였다.
허씨는 어느날 전씨가 두견화를 화폭에 담고 붙인 화제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두견화가 피니까 두견새가 우는데 나는 언제나 고향 땅에 갈 수 있을까」
정처 없는 나그네 허씨는 고향 잃은 스승 전씨의 심경에 크게 공감했다.
허씨는 이듬해 대만국립사범대미술과에 입학하면서 부창부·호극민씨 등에게서 본격적으로 동양화를 배웠다. 매일 같이 고궁박물관을 드나들며 원대의 대가 황공망의 작품 「당춘산거도권」을 1백여장이나 임화하며 필법을 익히기도 했다.
화가로 변신한 허씨는 대만에 건너간지 6년만에 잠시 귀국, 85년9월 서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삼베가닥 같은 피마파법을 이용해 산의 괴양감을 표현한 독특한 그의 산수화는 국내 화단으로부터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그해 그는 대만대에서 만난 이병희씨(35)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꾸몄다. 이씨는 당시 대만대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허씨는 7년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87년 귀국,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지난 6월19∼24일 조형미술관에서 세번째 산수화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에서 그는 생동감 있는 산의 사의적 풍경을 건필 기법으로 담은 『무산』 연작 30여점을 선보였다.
그는 이 작품들을 제작키 위해 수 없이 설악산을 찾았다.
『새벽에 일어나 안개 낀 설악산을 보고 있노라면 산은 마치 짐승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산의 정기를 담아내려 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도 그를 아는 이들이 몰려와 격려와 축하의 뜻을 전했고, 전시작품이 모두 팔려 나가는 성황을 이뤘다.
그는 매일 10여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대부분 서서 그리다보면 온몸이 저려오는 고통을 참아내야한다. 부어 오른 왼손이 잠시도 가라앉을 날이 없다.
그래도 그는 그림을 그려야만 산다. 그림 속에 자신의 이상향을 꽃피우며 불우했던 과거를 잊는다. 『장애는 장애라고 느낄 때 성립합니다. 우리 주변엔 곁은 멀쩡한 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동안 저를 격려하고 도와준 많은 이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좋은 작품을 그리는 것뿐입니다.』
그는 우연히 시작했던 「붓 장난」이 자신의 새로운 삶을 열었다며 오늘도 힘차게 먹을 간다.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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