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도덕적 해이 조장하는 ‘문제적 법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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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나랏돈을 제대로 쓰려는 고민은 사라졌다. 돈을 쓰는 과정에서 빚어질 혼란과 혼선도 무시한다. 정부가 하지 않아야 하는 일과 건드리지 않아야 할 돈에 대한 판단도 흐릿해졌다. 시장 경제 측면에서 ‘문제적’으로 보이는 이런 법안들이 거대 야당의 주도 속 오는 28일 열릴 예정인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될 전망이다.

 대표적인 ‘문제적 법안’은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한 양곡관리법(양곡법) 개정안과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법(농안법) 개정안이다. 양곡관리법은 쌀값이 폭락하면 팔리지 않은 쌀(초과 생산량)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것이 골자다. 농안법은 쌀과 과일·채소 등 농산물 가격이 기준가격 미만으로 떨어지면 정부가 생산자에게 그 차액을 지급(가격 보장제)하는 게 핵심이다. ‘농산물 가격 안정 심의위원회’가 평년 가격을 기초로 생산 비용과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기준가격을 정하도록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농산물 가격 안정 제도는 최근 농산물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급등으로 살림살이가 힘든 소비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며 “농가 경영이 안정되면 생산도 안정화돼 농산물 공급을 원활히 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금(金)사과’부터 양배추까지 농산물 가격 급등에 질린 소비자에게 ‘가격 안정’이라는 말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농안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소비자 이익이 아닌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저가격제다. 생산자 입장에서 가격 보장 품목으로 정해지면 시장 가격이 아무리 내려가도 괜찮다. 정부가 기준가격과의 차액을 보전해주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생산자의 합리적인 선택은 품질과 무관하게 공급을 늘리는 것이다. 이들 품목의 과잉 생산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가격 보장 품목으로의 쏠림 현상은 농산물 전체의 공급과 가격 구조를 왜곡할 수 있다. 정부가 가격을 보장하면서 기르기 쉬운 높은 작물로 생산자가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게 쌀이다. 쌀은 기계화율이 99%에 달할 정도로 영농 편의성이 높다. 게다가 양곡법과 농안법으로 ‘묻고 더블로 가’가 가능한 만큼 이미 자급률이 100% 이상인 쌀 생산량이 더욱 치솟을 것이란 게 정부와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반대로 생산자 입장에서 기르기 힘들고 가격 보장 품목이 아닌 농산물 생산은 꺼릴 수 있다. 해당 품목의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급등은 예상 가능한 수순이다. 식자재 전반의 공급과 가격이 불안해질 수 있다. 원재료 값 인상에 따른 자영업자의 타격이 예상되고, 외식업계가 경영 부담을 우려하며 법 개정을 반대하는 이유다.

양곡법·농안법, 시장·정책 왜곡
재정부담 늘고 농업경쟁력 약화  
전세사기법은 형평성 논란 우려

 더 큰 문제는 돈이다. 정부는 양곡법 등이 시행되면 쌀 보관과 매입에만 매년 3조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한다. 농안법도 ‘돈 먹는 하마’가 될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원구원은 5대 채소류에 대해 평년 가격으로 가격보장제를 시행하면 연평균 1조2000억원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게다가 가격 보장 품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맞서고 형평성 논란이 빚어지며 품목이 늘게 되면 소요 비용과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재정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이들 작물 매입에 돈을 쏟아붓다 보면 정작 필요한 농업 관련 정책에 쓸 재정은 부족해진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양곡법과 농안법을 ‘농망법(농업을 망칠 법안)’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 개정안도 또 다른 ‘문제적 법안’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공공기관이 전세 사기 피해자의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을 우선 사들여 보상한 뒤 구상권 등을 통해 자금을 회수하는 ‘선(先) 구제 후(後) 회수’가 법안의 골자다. 야당은 전세 사기를 ‘사회적 재난’이라고 강조하며 법안 통과를 주장한다.

 하지만 사인(私人) 간 거래에서 발생한 피해를 정부가 구제하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는 데다, 다른 사기 범죄 피해와의 형평성 논란도 불거질 수 있다. 전세 사기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청약저축 등으로 조성한 주택도시기금을 사용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무주택 서민이 잠시 맡긴 돈(청약저축)으로 전세자금 피해자를 직접 지원하면 수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손실이 고스란히 다른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 정부의 이야기다.

 ‘문제적 법안’의 문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없이 시장 왜곡을 가져올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데 있다. 그에 따른 부담은 결국 사회적 혼란과 긴 세금 청구서로 국민에게 날아든다. 야당의 선심성 돈 잔치에 나랏돈이 눈먼 돈, 쌈짓돈이 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