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과의 만남은 박복했다…출신 다른 이승만·김구 공통점

  • 카드 발행 일시2024.03.20

연재를 시작하며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세상이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간다. 걱정이 되면서도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는 오히려 기시감(데자뷔)을 느끼면서 그때가 지금의 시대에 어떤 답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이제 내 가슴과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

그리고 문득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나오는 시구, 곧,
‘늙음이 점차 다가옴이여,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지 못할까 두렵구나’
(老冉冉其將至兮 恐修名之不立)
하는 초조감도 있다.

그렇다고 회고담은 아니다. 나에게는 40여 년 교직생활에 글로 쓸[敍述] 수 있는 이야기와 쓸 수 없는 세속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그런 노변한담을 쓰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를 보는 나의 시각은 일상사를 주목하는 아날학파에 가깝다.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B Pascal)의 말처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역사를 바꾸었듯이” 역사에는 소소한 사건이 큰 격랑보다 더 치명적일 때가 많았다. 이 칼럼은 그런 낙수의 모임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제1부〉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

① 은원(恩怨)의 30년

1945년 12월 1일 한국으로 돌아온 임시정부를 환영하는 행사에서 나란히 앉은 이승만(왼쪽)과 김구. 중앙포토

1945년 12월 1일 한국으로 돌아온 임시정부를 환영하는 행사에서 나란히 앉은 이승만(왼쪽)과 김구. 중앙포토

삶에서 운명이 차지하는 힘

1980년대 초, 나는 마키아벨리를 강의하면서 교재가 마땅치 않아 아예 『군주론』의 원문으로 가르치다가 이럭저럭 초고를 정리해서 번역·주석해 출판했다. 애초 의도는 강의용이었지만, 내용에 감동하는 바도 있고, 기존 번역판도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전하에게 상소하는 글 가운데 “위대한 궁수는 과녁보다 조금 높게 겨냥해 시위를 당깁니다”라는 말에 나는 깊이 감동했고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에 빠지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에게 충언하면서 “전하께서 오늘의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는데, 첫째는 타고난 운명(fortune)이고, 둘째는 전하가 이제까지 남긴 덕망(virtue)이고, 셋째는 역사가 부르는 순간(calling)에 전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라는 대목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역사학자 토인비(A J Toynbee)는 이 세 가지를 합쳐 업장(業障·karma)이라는 용어를 썼다.

너무도 다른 운명

이승만(1875~1965)과 김구(1876~1949)를 논의하는 글머리에 이 대목을 소개하는 것은, 두 사람의 일생도 마키아벨리의 이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끝내 유교적 권위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은연중에 공·사석에서 “과인(寡人)…”이라는 말을 썼고(손세일),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 하는 연설을 나도 들었다.

그와는 달리 역신(逆臣)인 김자점의 후손인 김구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열등감으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만한 항일투쟁을 쌓고 이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명망을 얻은 그가 상해 임시정부(임정)를 찾아가 경비원을 자청한 것이라든가, 임정 주석으로 추대되었을 때 그를 사양한 것은 그의 미덕이려니와, 이승만이 임정 초대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을 때,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의 직함을 대통령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한 것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