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 카드 발행 일시2024.03.27

〈제1부〉 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  

 ② 상하이 임시정부의 비극

1946년 8월 15일 열린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함께한 우남 이승만(왼쪽)과 백범 김구. 중앙포토

1946년 8월 15일 열린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함께한 우남 이승만(왼쪽)과 백범 김구. 중앙포토

3·1운동 후 조국을 떠난 지사들

이제까지의 3·1운동사 연구는 민족 정기와 진압 과정에 매몰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지만 달리 보면, 경제적 민족주의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개명, 공화주의, 동양 평화, 그리고 그 총화로서의 독립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담은 3·1운동은 매우 복잡다기한 측면을 담고 있다.

시위의 폭풍이 지나간 다음 당대 지식인들은 다소 허무한 심경으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회한에 젖었다. 지식인들에게는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한 우울한 기억(hypochondria)이 있다. (A Marshall) 무저항 투쟁은 옳았나? 그렇게 민중을 이끈 지도부의 판단에는 오류가 없었나? 우리는 과연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역량을 갖췄나? 하는 회한은 민족 정기를 드높였다는 것만으로 덮어둘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시 인구는 1700만 남짓했는데, 그 가운데 103만 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다. 전 국민의 6.1%에도 미치지 않았다. 장기 후유증으로 사망한 숫자를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940명 정도가 죽음을 겪었으니, 우리가 피상적으로 “2000만 동포가 모두 일어났다”는 표현은 여염의 이야기일 수 있다. 반면에 전국 220개 군현 가운데 211개소(96%)에서 봉기했으니, 그런 면에서는 거족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국사편찬위원회 DB)

당사자나 유족들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결국 3·1운동은 그 최종 목표인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라는 사실이 지식인들을 괴롭혔다. 왜 한국의 시민혁명은 좌절됐나? 일제의 통치는 ‘헌병 정치(garrison state)’라는 독특한 형태였다. 식민지 통치의 모델인 영국의 자치 정책과도 다르고, 오랜 시간에 걸쳐 냄비 속의 개구리 죽이듯 하는 중국의 동화 정책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또한 일본은 도서(島嶼) 민족으로서의 폐쇄공포증이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 같았으며, 종교적 죄의식이 없는 민족(철학자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이어서 피식민지 국가의 저항을 용서하지 않았다.

상하이 임시정부 안팎의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