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나라’ 건국한 괴짜 CEO, 또 제주땅 파서 나라 세웠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2.21

강우현. 그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3월이었다.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칠순 넘은 관광업계 어르신을 호칭 빼고 부르는 건, 강우현이란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어서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판을 뒤집는 괴짜 CEO이자 안일과 나태에 찌든 일상을 호되게 일깨우는 혁신의 아이콘로서 나는 강우현을 이해한다. 설명하자면 긴데, 한번 해보자.

20년 넘은 여행기자에게는 직업병이 있다. 아무리 빼어난 경치를 봐도 시큰둥하고 무덤덤해진다. 말하자면 매너리즘에 빠진 것인데, 처방이 영 마땅치 않다. 매화도 좋고 벚꽃도 좋지만,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꽃이 피고 지는 장면을 20년 넘게 지켜보는 일은 때로 고역일 수 있다. 자연은 되풀이해야 자연이지만, 관광은 되풀이만 해서는 산업이 될 수 없다.

한국 관광산업의 병폐가 예 있다. 한국 관광은 도무지 바뀌려 들지 않는다. 아무도 하지 않은 시도는 엄두도 안 낸다. 남들이 성공하면 따라 하기 급급하고, 당장 별문제 없어 보이면 후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전국 방방곡곡에 들어선 케이블카와 출렁다리 따위가 따라 하기 관광정책의 산물이고, 횡재가 들어 3년을 호의호식하다 운이 나가자 뒤늦게 허둥대는 꼴이 시방 제주 관광의 민낯이다.

강우현은, 내가 지켜본 20년 내내 달랐다. 남이섬을 무수히 드나들었지만, 남이섬은 갈 때마다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강우현은 변덕이 심했다. 나무를 여기에 심었다가, 다시 저기로 옮겨 심은 작업을 여러 번 목격하기도 했다. 강우현의 어지러운 변덕은 어떨 땐 장난 같았고 어떨 땐 실험 같았는데, 지나고 보면 혁신이었다. 강우현이 변덕을 부릴수록 남이섬은 다양해지고 풍성해졌다.

🕵️ 강우현 누구인가

제주 탐나라 공화국 강우현 대표.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장난기가 여전하다. 손민호 기자

제주 탐나라 공화국 강우현 대표.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장난기가 여전하다. 손민호 기자

1953년 충북 단양 출생. 홍익대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서울랜드·제일은행의 로고가 디자이너 강우현의 작품이다. 칸영화제 포스터도 제작한 바 있다. 노마국제그림책원화콩쿠르, 일본 고단샤 출판문화상 수상 등 그림책 작가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잘나가는 디자이너이자 그림책 작가였던 강우현은 어느 날 착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시민운동에 뛰어들더니 ‘재생공책 쓰기 운동’을 시작으로 환경운동에 매진한다. 친환경은 강우현의 경영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키워드다.

2001년 9월. 강우현은 경영난에 빠진 남이섬에 CEO로 전격 투입된다. 2001년 남이섬 대표이사를 맡을 때 ‘월급 100원’의 계약 조건은 여전히 강우현을 가장 잘 설명하는 에피소드다. 그만큼 남이섬이 어려웠고, 그만큼 강우현은 자신이 있었다. 강우현이 남이섬을 맡은 지 3년 만에 남이섬은 한류관광 1번지로 거듭난다. ‘겨울연가’ 덕을 봤다지만, ‘겨울연가’ 촬영지는 전국에 10곳도 넘었다. 그중에서 남이섬만 살아남았다. 소주병을 녹여 꽃병을 만들고, 내다 버리는 은행잎을 실어 와 낙엽길을 조성하고, 토끼를 섬에 풀어놓고, 고드름을 얼려 동남아 관광객에게 선물하고, 전 직원을 평생 고용하는 이른바 역발상 경영이 거침없이 추진되었다(국내여행 일타강사의 ‘남이섬 이야기’ 바로 가기).

2006년 3월 1일. 남이섬은 국가체계를 빌린 테마파크 ‘나미나라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가평 선착장을 국제공항 출입국관리소처럼 꾸민 것도, 입장권을 여권이라 부르는 것도, 중국 국기와 대만 국기가 나란히 펄럭이던 것도 이때 시작됐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남이섬은 연 방문객 300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 300만 명 중 100만 명이 외국인이었고, 외국인 국적은 150개가 넘었다. 남이섬 입장객이 300만 명을 돌파한 2014년, 강우현은 홀연히 제주도로 내려갔다.

박근혜 정부 때 한국관광공사 사장 제안이 왔었으나 단칼에 뿌리쳤다. 강우현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공무원이다. 창의성 없이 시킨 일만 하는 사람들이어서다. 지겹고 심심한 걸 참지 못하는 특이 체질이다. 남이섬에서는 하루에 두어 시간만 잤지만, 제주도에서는 “희한하게 잠이 잘 와” 네다섯 시간은 잔다. 여전히 소주 두어 병은 거뜬히 마시고, 담배도 하루에 두 갑 가까이 피운다. 그가 우는 걸 본 적이 없다.

강우현이 감행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어느 날 문득 제주도로 내려간 일이다. 2014년 2월 21일 강우현은 제주시 한림읍 약 10만㎡(3만 평) 면적의 돌밭에서 탐나라 공화국 기공식을 열었다. 그리고 그해 말 남이섬 대표이사에서 정식으로 물러났다. 2015년 1월 2일자 일타강사와의 인터뷰에서 강우현은 “남이섬이라는 캔버스에는 더 이상 그림 그릴 데가 없다”며 “새 캔버스를 찾아서 떠난다”고 말했다.

강우현이 제주도로 내려간 지 오늘로 정확히 10년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강우현은 나라를 일으켰다. 먼 옛날 중국의 노인처럼 꾸역꾸역 산을 옮기더니, 언제 배웠는지 첨단 AI 기술을 동원해 제주 하늘에 추모 테마공원을 지었다. 2월 22일에는 탐나라 공화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 평생교육공원 선포식을 연다. 전국 77개 기관·단체·기업과 업무협약(MOU)도 맺는다.

국내여행 일타강사는 19번째 강의에서 강우현의 제주 생활 10년을 추적한다. 중산간 돌밭에서 첫 삽을 뜰 때부터, 허무맹랑한 축제를 열고 황당무계한 사업을 밀어붙일 때도 그를 지켜봤다. 제주도에서도 강우현은 활력이 넘쳤고, 끊임없이 일을 벌였고, 뜬금없는 무언가를 궁리했다. 다시 한번 칠순 어르신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본인은 제주에서 10년간 나이를 먹지 않았다고 우긴다), 강우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지칠 줄도, 늙을 줄도 모르는 괴짜를 뜻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