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노트북을열며

'포용'계속은 김정일 지지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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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94년 7월 22일자 중앙일보 27면에 '북한 더 잘 살아야 개방 빨리 온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북한의 개방을 이끌어 내려면 북한 경제가 더 좋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했던 나라들과 사회주의 붕괴를 겪었던 동구권 국가들을 모델로 삼았다.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루마니아.헝가리 등이 이에 해당됐다. 대개 1인당 국민소득이 1000~3000달러 사이에서 체제 변동을 겪었다. 경제가 발전하면 국민의 기대 상승이 폭발하고, 이것이 체제 변화의 단초가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경제 발전은 독재정권의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용감하게' 썼다.

그런데 취재에 도움말을 준 정치학자 한 분은 이런 말을 했다. "경제 발전이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이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신문기사로는 그럴 듯한 읽을거리가 될 수 있다." 학술적으론 말이 안 되지만 '무식한' 기자에게까지 시비 걸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도 기사를 쓰긴 썼지만 뒤끝이 영 찜찜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 포용정책을 보고는 경제 발전으로 북한 내부의 개방압력이 커지면 변화가 있을 수 있겠다는 소박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실험을 접하고 나서는 스스로 무식함을 넘어 현실 인식의 유치함을 통감하게 됐다. 그러면서 포용정책의 틀도 왠지 엉성해 보이기 시작했다.

포용정책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체제변화, 즉 개방과 민주화를 유도하겠다는 목표에서 출발했다고 믿고 싶다. 정부가 누구인가의 개인 영달을 위해 북한에 돈을 퍼줬다고는 보지 않겠다. 그런 의도의 순수성에 매달려서인지 정부는 북한의 핵실험 이후에도 포용정책의 방향에 대해선 계속 옳다고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따져보자. 포용정책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보통 어떤 국가를 가리킬 때 대개 세 가지 차원이 혼용되곤 한다. 가장 좁게는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집권세력이다. 그 다음은 당장의 집권세력과 관계없이 항상적인 통치행위를 하고 있는 정부나 통치체제다. 가장 포괄적으론 영토.국민.주권을 지닌 국가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런 기준으로 북한은 김정일 정권, 포스트 김정일을 포함한 북한의 통치구조, 국가로서의 북한으로 나뉜다.

결과만 놓고 보면 포용정책의 가장 중요한 지원 대상은 김정일 정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국가로서의 북한을 지원하는 것처럼 착각했거나, 아니면 스스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보이도록 유도했다.

또 정부는 대북 지원이 핵 개발로는 안 갔다고 주장하지만 핵을 개발한 김정일 정권의 호주머니를 불려준 이상 자금의 용도와 출처를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 물론 남북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북한의 경제 성장에 일부 기여했다는 점은 성과로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체제 변화의 임계점과는 까마득한 거리를 둔 채 김정일 정권을 더 강화시켜 줬다.

게다가 북한 내부의 권력역학만 따지면 이번 핵실험은 김정일 정권의 친위 쿠데타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 김정일 정권이 강경파를 중심으로 체제 장악력을 한층 강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용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거나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건 김정일 정권에 대한 지지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정 하겠다면 강철 같은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북한의 집권세력을 어떻게 북한 주민과 분리시킬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남윤호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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