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전력 숨긴 독일 여성 60년 만에 들통 … 미국서 추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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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나치 범죄자가 숨을 곳은 없다. 나치 친위대원(SS)으로 일한 과거를 감추고 유대인과 결혼해 미국에 정착했던 독일 여성이 40여 년 만에 덜미를 잡혀 미국에서 추방됐다.

미 법무부는 히틀러 정권 당시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던 엘프리데 리나 링켈(83)을 이달 초 독일로 추방했다고 19일 발표했다. 링켈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에 숨어살다 적발돼 국외 추방된 나치시대 가해자 100여 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다. 20일 미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는 나치 전력이 들통나 인생 황혼기에 미국 땅에서 쫓겨난 링켈의 사연을 소개했다.

동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링켈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년 악명 높던 라벤스브루크 강제수용소에 배치됐다. 당시 나치는 이곳에 붙잡혀온 유대인 여성들을 노예처럼 부렸고 가스실 처형과 생체실험을 통해 잔인한 살해를 일삼았다. 수많은 재소자가 굶주림과 질병.탈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특히 최소 1만여 명은 수용소 안팎을 감시하던 군견의 공격을 받아 비참하게 희생당했다. 링켈은 바로 이 군견을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던 경비원이었다. 그는 후일 "공장에서 일하기 싫었고, 더 많은 보수를 준다고 해서 개 훈련 근무를 지원했다"며 "개를 죄수 공격용으로 쓴 적이 없고 나치당 행사에 참석한 적도 없다"고 해명했다.

1년간 경비원 생활을 했던 링켈은 45년 종전이 된 후 수용소를 떠났다. 그러곤 독일땅에서 유대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에겐 나치 전력을 감쪽같이 숨겼다. 과거를 청산한 그는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링켈은 바텐더로 일했던 남편과 유대인 지역사회에 잘 적응해 살았다. 이웃사람들은 "부부간의 금실이 무척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남편 프레드는 결국 아내가 친위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생을 마쳤다. 링켈도 남편 무덤 옆 자리를 예약해 삶을 마무리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끈질긴 나치 범죄 추적자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79년 설립된 미 특별수사국(OSI)은 약 7만 명의 이민자 명단을 대조해 가며 당시 라벤스브루크 수용소의 직원을 찾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결국 당국은 신분을 숨긴 채 미국 비자를 받아낸 링켈을 찾아냈다.

당뇨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관절염 때문에 지팡이에 의존하고 있는 링켈도 순순히 과거를 자백했다. 미 법무부 직원은 "상냥하고 친절해 보였지만 과거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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