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궁의 한소대좌(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이 크렘린궁을 방문하고 소련최고실력자들과 만났다는 사실은 6공외교정책의 핵심과제인 북방외교정책이 실질적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 사건이다. 우리는 이 행사가 주는 현실적 상징성뿐 아니라 한국외교의 지평을 크게 넓혀주는 역사적 계기로 평가하고자 한다.
소련과의 첫 고위 공식접촉이 야코블레프 소련정치국원의 말대로 「양의 축적이 질의 변화를 가져오는 상황」을 언젠가는 몰고 오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획기적 변화를 앞두고 당국이 유의해야 할 두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우리가 북방정책에 대해 거듭 주장해온 바와 같이 당국은 너무 서둘지 말고 앞뒤를 침착하게 저울질하면서 한소관계를 전개해야 된다는 점이다. 6공지도부가 북방정책을 처음 추진할 때 내놓은 원칙은 이 정책의 궁극적 목표가 남북한관계의 개선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천안문사태이후 북한이 중국과 함께 전통 공산주의 고수 연합관계를 굳히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및 동구권과의 관계개선이 북한에 직접영향을 미치리라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적어도 당분간은 북한과의 연계성보다는 북방정책 그 자체의 실익을 기준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볼때 한소관계를 진전시킬 이유는 우리쪽의 투자등 경제협력을 기대하는 소련쪽에 더 많다고 본다. 김최고위원의 방소를 전후해 나온 보도내용은 그런 현실과는 달리 관계정상화를 성사시키려는 조급성이 한국쪽에서 더 나오고 오히려 소련이 이를 이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여기서 특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한소 정상회담의 성사와 같은 화려한 행사가 한국 내정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호재라는 생각에 당국자들이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장기적 안목과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아래서 적어도 수십년은 내다보는 외교적 토대를 마련한다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째는 지금과 같은 초기단계에서는 한소관계의 「질적 변화」가 주변국가들과의 기본관계 틀을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특히 신중해야 할 부분은 중국과의 관계다. 중소는 오랜 분규를 끝맺고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천안문사건이후 서로 다른 길을 지향하면서 서로를 민감하게 견제하고 있다.
한국이 소련과 가까워지는 것이 곧 중국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중국지도층이 갖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된다. 북방정책의 궁극적 목표가 평양으로의 우회적 접근이라면 북한과 우호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는 소련과의 관계이상의 비중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ㆍ경제ㆍ군사적으로 깊은 유대를 유지해온 미일과의 관계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소련과의 관계개선은 한국외교의 정치ㆍ경제적 지평을 넓히는데 국한되어야 하며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 추호라도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비춰지면 역작용을 불러 올 가능성이 크다.
이와같은 점들을 냉철히 계산하는 선에서 김최고위원의 이번 동구방문이 실질적 성과를 거두게 되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