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생각이 가장 낡았다…한국 기업 좋은 일자리 만들 수 있나”

“정부 생각이 가장 낡았다…한국 기업 좋은 일자리 만들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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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창간기획] ④ 한국 기업은 좋은 일자리 만들 수 있나

일러스트 = 배민호 minodico@hanmail.net

일러스트 = 배민호 minodico@hanmail.net

모든 길은 일자리로 통한다. 경제의 성패도, 정치의 승패도 일자리가 가른다.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고기술·고경력자 창업 끌어내고 #스몰 베팅 통해 시행착오 쌓아야 #정부는 지원자 아닌 구매자 역할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지나친 고용 보호, 노동자 동기 억제 #자본시장 규제 풀고 금융 역량 키워 #벤처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게 해야 #홍기빈 전환사회연구소 공동대표 #정부 공공일자리 사업은 비효율적 #기업을 통한 완전고용도 포기해야 #한국판 뉴딜은 60년대식 산업정책

취직 걱정을 덜 하던 고속 성장의 시대가 있었다. 정규직으로 정년을 맞는 ‘좋은’ 일자리는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기술이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는 믿음도 생겼다. 변화는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찾아왔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은 인간 노동보다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기술 낙관론은 흔들렸다. 펼쳐볼 참고서도 없다. 4차 산업혁명은 한국이 처음으로 전 세계와 함께 겪는 동시대 기술 진보다. 노동시장은 꼬일 대로 꼬였다. 비정규직, 강성 노조….

정부는 다급하다. 지난 대선의 1호 공약은 81만 개의 일자리였다. ‘세금 일자리’는 숫자는 채우지만 좋은 일자리일 리 만무하다. 52시간제 확대, 최저임금 인상은 취약계층의 일을 빼앗는 ‘정책의 역설’ 논란을 낳았다. 일에 대한 정의를 아예 새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고차방정식이 된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은, 정부는,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3개의 지평에서 일자리를 향한 물음을 던진다. 한국은, 한국 기업은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나. 

“기업, 추격만 해선 경쟁력 없어…표준 만들어야 일자리 생겨”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2015년 한국 산업에 큰 물음표를 던졌다. 서울대 공대 교수 26인을 인터뷰해 펴낸 『축적의 시간』을 통해서다. 기술 기업의 도전을 저성장의 돌파구로 본 이 책을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챙겨 봤다. 그는 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업 경쟁력의 관건으로 “문제를 출제하는 역량”을 꼽았다. 지난달 17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기업은 좋은 일자리를 만들 만큼 경쟁력이 있나.
“반세기 동안 강했고 잘했다. 하지만 늘 상대를 두고 경쟁했다. 표준을 베끼고 변형하며 뛰어넘으려 했다. 열심히 추격했으나 글로벌 표준이 아예 없는 분야에 도전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지는 이유다. 2000년대 이후 수출 주력산업에 변화가 없었다. 도전적 기업이 줄었다는 얘기다. 표준을 만드는 것은 문제를 내는 데서 출발한다. 50년 관행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쟁력 유지는 어렵다.”
4차 산업혁명을 따라가기도 숨이 차다.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는 인간의 상호작용, 거래 관행, 물리적 환경을 모두 바꾸는 범용기술(GPT)이다. GPT가 한번 들어오면 이전의 1등은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겐 기회이자 위험이다.”
GPT가 오히려 일자리를 없앨 것이란 걱정도 크다.
“새 기업을 더 많이 만드는 수밖에 없다. 창업의 씨앗은 많이 뿌렸다. 이제는 스케일 업(고성장 벤처 육성)이 중요하다. 고기술·고경력 보유자의 ‘준비된 창업’을 이끌어내야 한다. 실리콘밸리의 기술창업이 바로 그런 거다. 물건과 기술을 팔 데가 생기면 일자리는 생긴다.”
스타트업보다 기존 기업의 혁신이 더 어렵다. 지름길이 있나.
“기업은 늘 어렵다고 한다. 혁신이 뭔가. 다 바꾸는 것? 신제품 뚝딱? 아니다. ‘스몰 베팅’이 필요하다. 미국 로보틱스 기업인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2009년 내놓은 로봇은 우스꽝스러웠다.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10년처럼 경험을 축적하고 시간을 견디는 힘이 혁신이다. 책으로 공부할 게 아니고 시행착오를 쌓아야 한다.”
신구 산업은 일자리를 놓고 충돌한다.
“국회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기술 규제는 영업권을 재조정하는 행위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일이다. 혁신 친화적 국회는 갈등을 상식적인 방식으로 수렴하는 국회다.”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연구비 지원자가 아니라 기술 구매자가 돼야 한다. 공공기관이 시장에 혁신 기술을 요구하면 시장은 수요에 답한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조 바이든은 미국 기업의 기술과 물건을 사는 데 7000억 달러를 쓰겠다고 공약했다. 실리콘밸리도, 중국 AI도 이렇게 컸다. 한국 조달사업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2018년 기준 공공조달 규모는 123조원이다).
한국판 뉴딜은 적합한 설계도인가.
“정부의 디지털 전환은 필연적이다. 환경친화적 기술도 전 지구적 요구다. 이걸 못 맞추면 수출도 못한다. 뉴딜이란 이름은 디지털 전환의 계기를 강조하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정부 생각 가장 낡아…최저임금·52시간이 일자리 막는다”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장과 기업을 믿는다. 발목을 잡는 건 정부라고 본다. 김 교수는 “정부의 사고방식이 가장 낡았다. 바뀌는 사회를 낡은 틀에 얽어매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확대는 낡은 사고의 결과물이란 지적이다. 지난달 24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그는 한국노동경제학회장(2018년)을 지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 질이 좋아진 거 아닌가.
“오히려 좋은 일자리를 없앴다. 최저임금을 급격히 인상한 정부는 대·중견기업에서 고용유지지원금을 거둬 소상공인을 지원했다. 더 큰 기업에 생길 좋은 일자리가 최저임금 일자리 유지에 쓰였다. 새 일자리를 가로막은 꼴이다.”
주 52시간제는 노동 여건 개선과 일자리 나누기 효과를 내지 않나.
“대기업의 고임금 근로자는 이미 주 52시간씩 일을 안한다. 제도를 확대하면서 저임금 근로자 소득만 줄였다. 1인당 노동투입 시간을 줄여도 추가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노동 소득만 줄고, 일자리는 안 늘어났다.”
그럼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나.
“가능한 한 뭘 안 하는 게 좋다. 지금 정부는 재분배·형평 정책을 일자리 정책이라고 포장한다. 모든 걸 정치적으로 생각하는 ‘정치 과잉’이다. 지나친 고용 보호는 노동자의 동기를 억제한다.”
코로나 위기다. 고용 보호가 불가피하다.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기업이 지금 비용을 최소화해야 V자 반등이 가능하다. 그런데 해고하지 못하니 기업 경쟁력은 계속 나빠진다. 사회적 책임인 실업 문제를 기업의 비용으로 떠넘겼다.”
그래도 정부가 나서면 기업이 뭐라도 만든다.
“국민이 그런 인식을 갖도록 정부가 만들었다. 나쁘고 잘못된 방식이다. 기업 총수가 정부 회의 다녀와서 발표하는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일 수 없다.”
기업도 묘수가 없긴 마찬가지다.
“경제 전환기의 일자리 소멸과 생성은 당연한 일이다. 특정 업종에서 일자리가 주는 건 걱정할 필요 없다. 네이버·카카오처럼 20년 전엔 생각도 못했던 기업이 많이 나오게 여건을 만들면 된다.”
그걸 하자는 게 한국판 뉴딜 아닌가.
“뉴딜펀드가 성공할 정도의 좋은 사업이면 민간이 알아서 한다. 굳이 그걸 세금에 행정비용까지 들여서 하나. 세금 많이 거두면 소비가 위축된다는 건 경제학의 기초다. ‘세금 일자리’ 만드는 동안 민간에서 없어지는 일자리 수를 감안해야 한다.”
신산업을 육성할 필요는 있지 않나.
“벤처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게 하면 된다. 자본시장 규제를 풀고 금융권 역량부터 키워야 한다. 은행장을 정부가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구조에선 어림없다.”
신산업이 성장해도 제조업처럼 대량 고용은 어렵다. 고용을 많이 한 쿠팡의 일자리도 대부분 배달 인력이다.
“소수의 수퍼스타 기업이 전 세계 시장을 독식하는 건 정보기술 시대의 대세다. 수퍼스타 기업에서 부(富)가 퍼져 나오면서 이전에 없던 업종이 생기고, 거기서 1등 하는 기업이 많아지면 좋은 일자리도 많아진다.”
노동개혁 요구는 크지만 잘 안 된다.
“정부 출범 초에 ‘보수 정권은 노동개혁을 못하니 이번 정부에서 꼭 해야 한다’고 많은 경제학자가 제언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전보다 고용 경직성을 심화시켰다.  노조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이래서는 새 산업을 못 키운다.”

“정부·기업으론 한계, 사회적 일자리 늘려야”

홍기빈 전환사회연구소 공동대표

홍기빈 전환사회연구소 공동대표

홍기빈 전환사회연구소 공동대표는 정치의 렌즈로 경제를 본다. 학·석사에선 경제·외교학을, 박사 땐 정치학을 공부했다. 주류 경제학에 비판적인 그는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고 정부가 산업을 육성한다’는 주장을 “2차 산업혁명 때 대공장에나 맞는 경제 상식”이라고 규정한다. 지난달 29일 서울 은평구 사회혁신파크에서 홍 대표를 만났다.

기술 진보가 일자리를 만들까.
“기술낙관론은 허상이다. 정보기술(IT) 혁명은 인간을 건너뛰고, 자산 시장과 기계를 직접 연결하는 ‘정보의 흐름’을 만들었다. 실업이 없으면 더 이상하다. 대다수 인간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좋아요’를 눌러 욕망의 정보를 생산하는 역할 말고는 현 산업사회에서 큰 의미가 없어졌다.”
생경하고 비관적이다.
“현실이 그렇다.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정규직 등 소수를 빼고는 불안정 노동이 상시화했다. 경제성장과 자본 축적을 목적으로 산업사회가 달리다 보니 기후 위기와 실업이 극심해졌다.”
좋은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지 않나.
“기업은 이윤 창출이 목적인 조직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고용 창출 같은 소리 그만하자. 기업을 통한 완전고용은 포기해야 한다. 기업은 정직하게 활동해 좋은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면 된다.”
정부가 만드는 공공 일자리가 답인가.
“아니다. 공공 일자리 사업은 비효율적이다. 일손 필요 없는 데 보내서 풀 깎고 나무 베는 식이다. 일자리는 사회적 필요에 맞아야 하는데, 공무원은 못 만든다.”
도대체 일자리는 어디서 만드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사회가 월급을 주면 된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종일 폐지를 주워도 고물상에 가면 3000원밖에 안 준다. 그런데 그가 생산한 사회적 가치는 그 이상이다. 동네가 깨끗해졌고 노인 우울증도 덜어준다. 폐지 값 이상의 가치에 사회가 5000원을 얹어주는 것이다. ‘참여 소득’이다.”
사회적 월급의 재원은 누가 대나. 결국 세금 아닌가.
“맞다. 그러나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공공근로(한시적 생계지원 사업)를 일자리라고 홍보하는 것과 다르다.”
청년 세대에게 사회적 일자리로는 충분치 않다. 정규직 경쟁이 치열한데.
“기업의 정규직을 늘려 청년에게? 저성장 고령사회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586이 하는 생각이다. 기업이 많아지면 일자리가 늘던 과거 경험에 젖어 노동력 재배치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국판 뉴딜이 60년대식 산업정책인 이유다. 앞으로 기존 기업에서 화폐 가치를 생산하는 일만큼 소셜 벤처 등이 만드는 사회적 가치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젊은 세대에게 거침없이 진화하는 IT 기술을 빠르게 습득·활용할 기회를 주는 게 중요하다. 대기업 인턴에게 매달리는 청년에게 사회적 일자리 인턴 기회를 늘려줘야 한다.”
복지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가.
“시장 이외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우파 경제학의 인식 때문에 생기는 물음이다. 사회적 가치를 뺀 시장 가치만으로는 최적의 자원 배분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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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 고정애·김영훈·하현옥·유지혜·권호·박수련·이소아·윤석만·강기헌·하남현 기자 q202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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