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묻다] 미래 쓸 돈 가불해 쓰면 나라가 망하나

[대한민국에 묻다] 미래 쓸 돈 가불해 쓰면 나라가 망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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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③ 미래 쓸 돈, 가불해도 되나

창간기획 3회 "미래 쓸 돈 가불해도 되나" 일러스트레이션. [일러스트 배민호 minodico@hanmail.net]

창간기획 3회 "미래 쓸 돈 가불해도 되나" 일러스트레이션. [일러스트 배민호 minodico@hanmail.net]

아들딸에게 더 많은 기회와 부를 물려주려는 것. 한국 사회 발전의 동력이자 표상이었다. 나라 살림도 마찬가지였다. 건전 재정은 역대 정부의 자랑이자 유산이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 #국가는 기본적으로 비능률적 조직 #돈 쓸 궁리만 해 문제, 차라리 감세를 #규제개혁 돈 안들지만 성장률 높여 #김유찬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건전 재정보다 성장률 관리가 중요 #저금리 땐 빚을 내는 게 더 유리 #경제위기 끝난 뒤 증세 범위 넓혀야

국가채무비율 40%라는 암묵지에 물음표를 던진 것은 현 정부다. “우리만 40%가 마지노선인 근거가 뭡니까”라는 대통령의 반문이 있었다. 복지 확대는 균형과 속도 논쟁을 낳았다. 감염병이 몰고 온 경제위기는 고삐를 풀었다. 사방에서 돈이 쏟아진다. 문 닫는 가게가 속출하고, 일자리가 사라지자 곳간지기가 해결사로 나섰다. 재정적자 따위는 신경 쓸 것 없다는 이론까지 나온다. 시각을 바꾸라는 목소리가 득세한다. 빚으로 보지 말고, 투자로 여기자는 얘기다. 재정 건전성은 ‘도그마’로 치부된다. 개인도 덩달아 빚을 낸다. 부동산에, 주식에 빚낸 돈이 몰린다. 빚이 능력이 됐다.

그러나 대차대조표는 불안하다. 경험하지 못한 적자가 기록된다. 빚은 반드시 복수한다. 누군가 갚아야 한다. 거품이 터지면 국가도 파산할 수 있다. 나랏돈이 세금이듯, 빚을 메우는 것도 세금이다. 결정과 책임 사이에 시차가 있다. 결정은 현세대가 하고, 책임은 미래 세대가 안는다. 그래서 묻는다. 지금의 돈 풀기는 정당한 가불인가. 후대가 감당할 만한가.

“나랏빚 급증, 코로나 세대 영원한 패배자 될 수도”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

“코로나 세대는 영원한 패배자가 될 수 있다. 그걸 막는 게 기성세대의 책무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미래에 쓸 돈을 당겨 쓰는 데 따른 첫 희생자로 현재의 20대, 코로나 세대를 꼽았다. 한경연의 대학생 취업인식도 조사(4일)에 따르면 올해 졸업생의 55.5%는 취업을 하기 힘들다. 권 원장은 “규제개혁, 노동개혁은 돈이 들지 않는다. 그러면 민간의 성장 활력을 자극해 향후 성장률을 높이고, 재정 수입도 늘고, 일자리도 생긴다. 그런데 지금은 돈 쓸 궁리만 하니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재정 확대 주장을 “무책임하다”고 일갈한다. 지난달 17일 서울 여의도 한국경제연구원에서 권 원장을 만났다.

초저금리다. 나랏빚을 내도 부담이 적다.
“금리는 오르락내리락한다. 가물었다고 홍수 대비 안 할 수 있나. 경제정책은 홍수와 가뭄, 모두를 대비해야 한다. 돈 함부로 쓰면 결국 망한다.”
빚내 수익을 챙긴 투자자도 있다. 국가도 이자 이상으로 성장하면 되지 않나.
“국가가 빚을 쉽게 늘리니 개인도 빚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부동산 투기 잡는다고 대출 규제를 하면 뭐 하나.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빚을 낸다는 신조어)’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정부가 만들었다. 빚내지 않고 저축한 성실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한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가 돈을 푼다.
“우리 재정이 외국과 비교해 괜찮다는 인식이 가장 큰 문제다. 비교 자체가 틀렸다. 경제 규모와 소득 차이가 있다. 미국이 달러로 채권을 발행하면 전 세계가 산다. 기축통화국이어서다.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신용평가사 피치도 ‘채무비율이 46%면 신용등급 하락 압력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외화 자금 이탈→금리 상승→기업 자금난→연쇄부도’로 이어진다. 제2의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
1997년 국가채무비율은 11.4%였다. 그래도 위기는 왔다.
“무책임한 얘기다. 해외 자금의 10~ 20%만 빠져나가도 위기가 온다. 외환위기 때 채무비율이 높았다면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망각하지 말자.”
급할 때 빚낸다고 나라가 망하나.
“90년대 초반 원리금 상환 비용이 일본 예산의 30~40%였다. 복지 등 경직성 지출을 빼고 나면, 미래 산업 예산은 10~20%뿐이었다. 그래서 잃어버린 20년이 왔다. 부모에게 많은 빚을 물려받은 자녀는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원리금 족쇄를 찬다. 이런 부담을 국가가 미래 세대에 주고 있다.”
과거 도식 아니냐. ‘적자·물가 걱정 말고 지출을 늘리라’는 현대화폐이론(MMT)이 주목받는다.
“과거보다 화폐 유통 속도가 낮아 물가가 안 오르는 것 같지만 결국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반(反)기업법으로 만일을 대비해 기업이 현금을 움켜쥐고 있다. 그래서 돈 풀어도 물가가 안 오른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다른 방법이 있나. 지금은 위기다.
“위기일수록 교과서로 돌아가야 한다. 누가 가면 따라가는 ‘들쥐 현상’은 반복된 실패인데 매번 잊는다. 나도 공무원이었지만, 국가는 기본적으로 비능률적인 조직이다. 민간이 할 일을 정부가 하면 돈만 들고 효율은 떨어진다. 차라리 감세해라.”
정치권도 지출 확대가 대세다.
“재정 적자 때문에 1984년 예산을 동결했다. 사상 최초로 국방 예산도 삭감했다. 육군 장성들이 권총을 찬 채로 경제기획원에 들이닥쳤다. 문희갑 당시 예산실장은 그래도 버텼다. 그렇게 지켜 온 재정이다. 이런 각오가 없으면 ‘빚을 떠넘긴 정부’라는 오명이 남을 것이다.”
재난지원금처럼 주머니에 돈 꽂히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나.
“누군가는 갚아야 하는 돈이다.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특히 2030세대는 그렇다. 본인이 부담할 돈이다. 노르웨이는 미래를 위해 석유 팔아 번 돈을 국부펀드에 쌓아 놓는다. 스위스는 공짜로 돈을 주는 기본소득을 스스로 거부했다.”
무작정 안 쓰는 게 능사냐.
“제대로 쓰자는 거다. 저출산 대응에 10년간 210조원을 풀었다. 결과는 출산율(2019년 0.92명) 세계 꼴찌다. 주택·일자리·교육 등 구조적 문제는 놔두고 출산장려금 같은 복지만 늘렸기 때문이다. 노조가 소수 근로자만 대변하는 노동시장이 바뀌지 않으면 그 폐해는 취업을 못 한 청년 세대가 입게 된다.”

“재정 확대가 세계적 흐름이다, 국가가 역할해야”

김유찬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김유찬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나라 살림을 깐깐하게 따져 온 곳이다. 그러나 최근 ‘적극적인 재정 운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래 가불’ 질문에 김유찬 원장은 “세계적인 흐름을 봐라. 주류가 뭔지 잘 생각해 보라”고 되물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재정정책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주류다. 장기 성장 관점에서 국가의 역할을 놓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한국은 신중한 확대를 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지난달 23일 서울 출장길의 김 원장을 반포동 서울지방조달청에서 만났다.

신중한 게 맞나. 너무 빨리, 많이 쓰는 것 아닌가.
“유독 한국에서만 재정 건전성 우려가 크다. 한국 재정은 주요국 대비 건전하다. 올해 네 차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지만, 실제 지출 확대 규모는 37조원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의 2% 규모다. 미국은 10% 넘게 늘렸다.”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다. 단순 비교는 무리다.
“(기축통화국이 아니라 문제라는 것은) 굉장히 잘못 알려진 얘기다. 크기가 압도적인 미국·중국을 빼곤 다 한계가 있다. 우리 경제도 취약점이 있다. 따라서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미국·일본 등과 대비해 격차를 두고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면 문제가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이 기준점이 높아졌다.”
핵심은 ‘나랏빚이 늘면 결국 망한다’는 점이다.
“일본은 국가채무비율이 220%를 넘는다. 그러나 일본이 망한다고 보는 견해는 드물다. 일본 채무의 90%를 국내에서 보유하고 있어서다. 일본은 저축 규모가 과하다. 국채를 발행해 소비와 투자를 일으켜 경제 전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게 좋다. 저금리여서 채무 증가에 따른 부담도 적다. 일본 입장에선 국채 발행이 여러 측면에서 더 좋은 선택일 수 있다.”
일본의 특수성 아닌가.
“한국도 유사하다. 한국의 국외 채권자 비중이 12.5%다. 대부분의 채무를 국내에서 소화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37.3%다. 빚의 질적 측면에서도 한국이 더 나쁘다고 보기 어렵다.”
저금리 기조가 바뀌면 빚 부담이 급증한다. 어떻게 갚나.
“국제금융 시장을 좌우하는 미국과 같은 국가가 돈을 많이 풀었다. 저금리를 끌고 가는 게 미국에도 이득이다. 금리는 당분간 굉장히 낮은 수준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빚을 내는 게 더 유리하다.”
현세대의 결정 아닌가. 청소년은 의견을 내지 못한 채 빚을 떠안는다. 노르웨이처럼 국부펀드에 여력을 쟁여두는 게 맞지 않나.
“잉여 자금을 사회에 비축한다는 건 국민 경제의 균형적 성장을 해칠 수 있다. 재정 건전성보다 효율적인 경제 시스템을 물려주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려면 성장률을 연평균 3% 정도로 관리해야 한다. 여기에 재정이 충분한 역할을 해야 한다.”
후세대 부담이 큰 국민연금 등을 방치해도 되나.
“미래 부담이 뻔히 보이는 구조는 바꿔야 한다. 국민연금뿐 아니라 전체 노후소득 보장 체계 측면에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 경제 외 영역, 예컨대 수도권 과밀 방지나 지역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서도 재정이 역할을 해야 한다. 지역 병원, 공립학교, 공공도서관 등이다.”
통신비를 지원하며 “정부의 작은 정성이자 위로”라고 하자 “이 돈이 네 돈이냐”는 반발이 나왔다.
“세금으로 충당한 재정을 잘 써야 하는 건 당연하다. 경제위기 속에 통신비 지급으로 가처분 소득이 2만원 늘었다. 재난지원금 지원 과정에서 보편·선별 논란이 있었지만, 효과는 분명히 있다.”
정부가 나랏돈을 잘 썼나. 저출산·일자리 예산의 효과는 미흡하다.
“저출산과 일자리 감소는 막기 어려운 트렌드다. 그렇다고 정부가 손 놓고 있을 수 없다.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늦추면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기본소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고령화까지 생각하면 돈 들어갈 곳이 더 많다.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증세로 충당해야 한다. 최근까지 주로 초고소득층에 대해 증세를 했다. 경제위기가 끝난 이후 증세 범위를 여유 있는 계층으로 조금 더 늘릴 필요가 있다.”

채무비율 연말 44%, 속도 빨라 위험? OECD 평균은 109%, 한국은 괜찮다?

나랏빚 비율 놓고 해석 엇갈려 

올해 말 나랏빚 규모는 정부 추산 846조9000억원이다. 현 정부가 출범한 2017년과 견주면 3년 새 186조원 넘게 증가한다. 2년 후(2022년 1070조원)면 국가채무 1000조원 선도 허물어진다. 올해 1600만원 수준인 1인당 국가채무도 4년 후면 2500만원을 넘어선다.

빚 규모가 적정한지를 절대 액수로만 보는 건 한계가 있다. 경제 규모가 크면 빚도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재무 건전성을 판단하는 지표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쓰인다.

정부가 예상한 올해 말 채무비율은 43.9%다. 숫자는 하나지만, 해석은 둘이다. 위기의 징후로 보는 쪽은 수치만큼 속도를 우려한다. 올해 수치는 지난해 본예산(37.1%) 대비 6.8%포인트 올랐다. 이 비율은 갈수록 오른다. 2024년 채무비율은 58.3%, 2045년 99%로 전망된다. 국회예산정책처 전망은 더하다. 2060년 157.8%, 2070년 185.7%다. 이 정도면 ‘디폴트(채무 불이행)’가 남의 일이 아니다. 디폴트를 겪은 아르헨티나의 채무비율은 지난해 88.7%다. 속도 제어가 어렵다는 면에선 스페인이 전례다. 2008년 39.4%였던 스페인 채무비율은 2012년 85.8%로 급증했다. 결국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괜찮다는 해석은 비교에서 나온다.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채무비율은 108.9%다. 한국의 두 배 이상이다. 게다가 세계적 초저금리가 뒤를 떠받친다. 지금은 나라 곳간을 더 열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다. 올해 미국(32.7%포인트), 일본(30%포인트)은 한국(7.6%포인트)보다 훨씬 빠르게 채무비율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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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 고정애·김영훈·하현옥·유지혜·권호·박수련·이소아·윤석만·강기헌·하남현 기자 q202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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