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할머니와 어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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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할머니와 어머니’- 문정희(1947∼ )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나는 등 뒤에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왔다

남편의 사진은 옷장 속에 깊이 숨겨두었고

이제는 바다처럼 넓어져서

바람소리 숭숭 들려오는 넉넉한 나이도

기꺼이 주민등록증 속에 끼워두고 왔다

그래서 나는 큰 가방을 들었지만

날을 듯이 가벼웠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그런데 웬 일일까

십수 년 전에 벌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감쪽같이 나를 따라와

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있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조심조심 길조심” 성가시게 한다



굳이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살아 있는 죽음’을 확인할 때가 있다. 아내와 다툴 때, 아이들을 꾸짖을 때, 나는 내가 아니었다. 십수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내 안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셨다. 십수 년 전까진 안 그랬는데 웃음소리, 하품하는 모양까지 아버지와 똑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아이들과 눈 맞추기가 두렵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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