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계엄군이 가로막은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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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80년 서울의 봄을 맞았던 정계는 신군부에 의한 5·17 계엄확대조치로 인해 여름을 맞기도 전에 다시 기나긴 겨울잠을 자야 했다.
군부가 질서회복이란 명분아래 5월17일 계엄확대조치를 발표하면서 김대중씨를 내란음모혐의로, 김종필씨를 부정부패혐의로 체포하고 사흘 뒤인 5월20일에는 국회를 봉쇄한데 이어 김영삼 신민당총재를 가택 연금했던 것이다.
당시 동교동 김대중씨의 총무비서 김옥두씨의 증언.
『5월15일께부터 정치인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있어 일부 의원들은 피신을 하기도 하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읍니다.
그랬지만 그 다음날 「글라이스틴」미대사가 동교동을 찾아와 조심스런 경계의 말과 함께 안도의 말도 해주고 가 위기라는 느낌은 있었으나 상황 자체를 아주 비관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런데 17일 저녁6시쯤 모신문 사회부기자라는 사람이 동교동을 찾아와 「지금 이대에서 회의를 하고있는 전국대학 학생회장들이 곧 잡혀갈 것」이라며 이상하다고 알려주더군요.
그리고는 약 2시간 뒤 이름을 밝히지 않은 40대 남자의 전화가 왔는데 「세상은 끝났다. 천지개벽이 됐다. 선생님신변을 잘 보호하라」는 말만하고 끊어버리는 거예요.
순간 우려했던 모든 것들이 현실로 다가왔구나 생각했읍니다.
곧이어 의원들로부터도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느니, 빨리 몸을 피하라는 등의 전화가 이어졌읍니다.
그래서 집안에 모여있던 비서진 일부가 바깥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나갔는데 바로 문밖에 차광막을 하고 안테나를 단 검은 세단 5대가 있다는 얘기를 해왔읍니다.
9시쯤 되자 5대의 검은 세단은 16대로 늘어났고 아무래도 모종의 사태가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아 대문을 굳게 잠가 두었읍니다.
그랬는데 밤10시50분쯤 벨소리가 났습니다 .집안에 있던 비서진과 경호원은 바깥에 나갔던 비서가 돌아오는 것인줄 알고 경호원 한 명을 내보내 문을 열어 주었읍니다.
순간 「탁」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준 경호원이 얼굴을 움켜쥐며 대문 앞에 그대로 쓰러졌고 착검에다 철모까지 쓴 군인 40여명이 밀고 들어와 경호원과 비서들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벽에 기대있으라고 했읍니다.
그들은 김대중씨 가슴에 총을 들이대고 옷을 갈아입힌 뒤 연행해 갔읍니다. 그때가 밤11시10분쯤이 됐읍니다.』
비슷한 시각, 청구동 김종필 공화당총재 자택에도 무장군인들이 와서 김총재를 연행해 갔다.
김종필 총재의 경호관이었던 최인관씨(당시 경위)의 증언.
『밤11시15분쯤 미니버스 2대에 Ml16소총을 든 병력이 집앞에 도착, 집주위를 포위했습니다. 이어 합수단 사복요원들을 태운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브리사 한 대가 도착하더군요. 집 주위를 총을 든 군인들이 에워싸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권총을 꺼내 들었읍니다.
그 순간 보안사 분실의 장모준위라는 사람이 들어와 「총재 계시느냐」며 「세상이 시끄러워 잠시 모시고가 상의할게 있으니 잠시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비상국무회의 소식도 이미 30여분 전에 듣고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제가 갖고있던 권총을 뺏고는 다른 사람들도 무장해제를 시키더군요.
장준위와 다른 사복수사관 2명은 김총재가 계신 방으로 갔습니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JP는 이들을 보고 「왔구먼. 갑시다」하고 일어섰고 이들은 「세상이 시끄러워 저희들이 모시러 왔읍니다」고 했읍니다.
이때 부인 박영옥 여사가 울먹이며 「이게 뭐요」라고 소리쳤지만 JP는 「나오게 될 거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이라며 장영순 공화당부의장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브리사 승용차에 수사관들과 함께 탔읍니다.
총재가 떠나고 난 뒤 약20분이 지나자 다시 사복요원 4명이 들이닥쳐 집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상도동 역시 3일이라는 시차와 갇히게 된 장소만 다를 뿐 동교동이나 청구동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영삼 신민당총재의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씨의 증언.
『다른 두 김씨가 잡혀가는 17일 밤 저희도 감은 운명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 밤 정재원대변인으로부터 「오늘 밤 거사가 있을 것 같으니 빨리 몸을 피하시라」는 전화가 왔고 곧이어 수명의 의원들로부터도 같은 내용의 연락이 왔읍니다..
그러나 막상 김영삼 총재 자신은「피하긴 어딜 피하느냐」며 오히려 옷도 한복으로 갈아입고 합수단 체포대를 기다렸지만 병력은 상도동자택 주위에 배치만 됐을 뿐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않고 있다가 철수했어요.
그 후 우리는 20일 열리기로 되어있는 국회가 열리게 되면 정치권자체가 통째로 함몰해 버리는 사태로까지는 발전되지 않으리라고 기대했읍니다.
18일과 19일을 보낸 김총재는 국회개회일인 20일 아침 내·외신기자들을 상도동자택으로 불러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당시 우리가입수한 정보는 광주사대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가고있어 그 같은 사실을 김총재가 직접 밝히려 했읍니다.
아침9시, 막 기자회견을 시작하려는데 밖에 있던 비서가 뛰어들어와서는 밖에 헌병 2백여명이 배치되고 있다고 알려 왔읍니다.
거의 같은 시각에 국회에 나가있던 비서진으로부터도 국회 앞에 탱크가 와 있으며 정문을 봉쇄했다는 전갈이 왔읍니다.
김총재는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듣고 서둘러 회견을 마친 뒤 마침 회견에 배석했던 황낙주 총무 및 의원 몇 사람들과 잠시 숙의를 한뒤 황총무를 국회로 보냈읍니다.
이때 당시 노량진경찰서장이 들어와 「오늘부터 김총재는 일체 외부출입을 못한다」는 통고를 했읍니다.』
상도동을 떠나 여의도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도착한 신민당의원들은 무장군인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의사당내부로 들어가려 했으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젊은 군인들을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황총무 등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욕을 하고 뚫고 들어가려 했지만 아무 소용없는 노릇이었고 민관식 국회의장대리도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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