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기대 저버린 북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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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겨레의 기대 속에 연 3일간 계속되던 남북의회회담 준비접촉이 아무런 진전 없이 정회상태에 들어갔다.
한국 측은 의제에서 신축성을 보여 처음의 입장에서 후퇴하는 등 양보가 있었음에도 북한측은 회담형식에서의 연석회의, 의제에서의 불가침선언을 고집, 당초의 입장을 고수했다.
북한은 처음부터 예비회담을 하루만 하자고 주장했고, 첫날 아무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자 회담을 유회 시킬 의도였다. 그러나 한국 측이 다음날 속개하자고 제의하여 사흘 간 계속될 수 있었다. 회의가 정체상태에 빠지자 우리측은 양측 대표단장간의 비밀 단독회담을 제의했다. 북측은 끝내 응하지 않아 우리 대표단이 서울로 철수하자 다음날 40분을 남기고 단장 회담을 갖자는 등 성의 없는 태도를 보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의 태도에서는 평양 측의 변화나 성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보려는 생각보다는 과거처럼 공작과 선전을 위해 회담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노출시켰을 뿐이다.
남한에서 정부교체가 있을 때마다 북한은 새 정부의 의도나 체제의 강도를 떠보기 위해 회담에 나오곤 했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올림픽을 앞둔 데다 우리 국회가 4당 체제로 다원화되고, 사회적으로는 학생과 재야가 정부와는 대립되고, 평양 측 주장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는 등 분열된 모습을 보여 북한이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이번 회담에 응한 듯 하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 임한 우리국회대표단은 4당 의원으로 구성됐으면서도 일관된 체계 하에 하나의 목소리를 보여주어 북한을 당혹케 했다. 다양성 가운데서도 통일과 조화를 보여준 개방사회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학생 운동권이나 재야 측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북한이 기대한 우리사회의 분열과 모순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북한은 바로 이점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그들이 대하는 만큼 취약하거나 위험한 상태는 아니다. 요행을 꿈꿔서도 된다. 만약 그런 전제 의에서 남 정책을 편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다.
이제 북한은 보다 진솔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나와야 한다. 1천명의 다중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어떤 대화와 합의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공산당 식 회의란 당의 간부가 짜 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지정된 사람이나가 당이 마련해 준 원고를 읽으면 참석자들이「정중히 경청하고 열렬히 박 수치는 행사」일뿐이다. 북한 식 연석회의는 바로 그 같은 방식으로 남북의회회담을 하자는 것 아닌가.
불가침선언을 하자고 주장하나 그 내용은 한미 방위조약 폐기, 주한미군 철수, 핵무기 철거 등 우리의 안보구조를 파괴하는 것들이다.
이제 공은 평양으로 갔다. 지금 양측의 기본입장은 모두 제시됐다. 이제는 대표단장이 마주앉아 마지막 타결을 시도함으로써 예비회담의 임무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측은 우리가 제의한 이 대표단장 단독회담에 응해서 솔직하고 깊은 얘기도 서로 나누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의회회담만은 성사시켜야 한다. 그것이 올림픽 공동참여를 포함하여 다른 분야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남-북 관계를 전반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새로운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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