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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파는 처녀'와 변하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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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큰 마을에 나가 영화를 보고 온 소년들이 산골 사람들 앞에서 상영시간과 꼭 맞게 그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이다. 큰 마을에 다녀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꼬박 나흘이니, 그동안엔 소년들도 똥지게를 짊어지는 노역에서 쉴 수 있다. 그러니 촌장 이하 모든 마을 주민이 또 다녀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재미있게 영화를 들려줘야만 했으니 소년들의 노고가 대단했을 것이다. 물론 소년들의 노력은 결실을 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들려준 영화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북한 영화 '꽃 파는 처녀'라는 점이다. 어떤 중국 지식인은 한류의 물결은 이미 오래전에 중국을 휩쓸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가 말한 오래전의 한류란 바로 북한 영화의 물결이었을 것이다. '꽃 파는 처녀'를 본 일은 없지만, 그 영화가 중국인들의 눈물을 짜내던 슬픈 영화인 것만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최근에 읽은 중국 작가 하진의 소설 '기다림'에도 이 영화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하진은 이 소설에서 '꽃 파는 처녀'가 아무런 플롯도 없이 시종일관 눈물만 흘려대는 영화라고 냉소적으로 얘기하지만, 그로 인해 온 극장이 눈물 바다가 됐다는 사실만은 인정한다. '꽃 파는 처녀'를 관람하는 일은 문화혁명 기간 중국인들에게 소중한 문화적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다이 시지에나 하진은 한 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풍속사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를 끌어다 썼을 것이다.

내게도 '꽃 파는 처녀'를 읽던 시절이 있었다. 1989년이었고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는 여러 가지 북한 소설들을 읽었다. 읽지 않아야 할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읽었던 것이었는데, 위에서 말한 중국인들처럼 완벽하게 몰입할 수는 없었다. '꽃 파는 처녀''민중의 바다''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의 소설을 다시 읽은 건 몇 년 전이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수많은 비유와 묘사였다. 소설들의 문장은 몇 번이나 고쳐 쓴 것처럼 정교하게 이뤄져 있었다. 왜 89년에는 그런 비유와 묘사에 주목하지 못했을까?

며칠 전 이제는 누구도 읽지 않는 러시아 혁명사에 관한 책을 읽었다. 소련이 몰락하고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출간된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만하임의 말이 나온다. "정치는 과학이 될 수 없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도, 레닌주의도 정치에 속하니 이는 곧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이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신입생이던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관형어였다. 정치는 과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이제 가슴 아프게 들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오직 변할 뿐이다. 중국인들 중에서 지금도 '꽃 파는 처녀'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나는 다시는 89년에 그랬던 것처럼 '꽃 파는 처녀'를 읽을 수 없게 됐다. 나도 변했고 세계도 변했다. 모든 것은 변했지만, 이 세계가 좀 더 살아가기 좋은 곳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사실만은 변할 수 없다. 오직 그 이유로 세계는 변한다. 그런 점에서 이따금 정치인들이 하는 얘기나 행태를 전해 들으면 좀 허망하다. 변화된 국민의 높은 의식 수준을 믿고 좀 진지하게 우리 잘 사는 길을 모색해주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김연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