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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성공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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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난 1월 대통령의 신년 연설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가 거론된 이후 얼마 전 발표된 스크린 쿼터 축소 발언은 온 나라를 한.미 FTA의 논쟁 속으로 휘말리게 했다. 사실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미국과 같은 대규모 국가와의 FTA 협정을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비록 현재까지 칠레 및 싱가포르와 협정을 체결했다고 하나 이는 매우 낮은 수준의 협정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소규모 국가들과 자질구레한 협정을 남발하는 것은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아시아개발은행 총재는 동아시아에서 우후죽순처럼 맺어지고 있는 각종 자유무역협정은 무역 창출이라는 이득보다는 원산지 규정을 포함한 복잡한 규정으로 인해 오히려 자유무역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 범위와 폭 면에서 가장 선진적이 될 한.미 간의 자유무역협정은 이러한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한.미 간의 협정 추진은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제까지 한국은 일본 및 중국과의 협정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이는 사실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들과의 협정은 자칫하면 별다른 실익 없이 각종 예외적인 조항들로 가득 찬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한.미 간의 협정이 맺어진다면 중국 및 일본으로 하여금 보다 진지하게 한국과의 협정을 추진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미국 경제의 중요성은 과거보다 감소됐으므로 미국보다는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 생산품의 태반이 미국으로 수출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언급이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제1의 소비시장이며 당분간 이러한 미국의 위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나 아직은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미 간의 협정은 대단한 난항이 될 것이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한.미협정이 국가 경제에 이득이 된다고 하나 이러한 이득의 수혜자는 침묵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가 된다. 반면 협정으로 인한 피해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특정 산업 종사자에 집중되게 된다. 더욱이 이들은 조직화돼 있으며 그 주장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선동적이며 다분히 구체적이다. 당연히 후자의 목소리가 더 크고 선명하게 들리게 마련이며, 양자 간의 논쟁이 치열해질 경우 자칫 반미 이념 논쟁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파행을 막기 위해서는 첫째, 협상의 주체인 정부가 보다 진지한 자세로 이해 당사자의 입장을 살펴야 한다. 지난번과 같이 협상 발표 하루 전날 공청회를 하는 식의 졸속 행정은 다시는 있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전체 국익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피해 산업에 대한 보상 및 보조가 있어야 하며, 기왕에 만들어진 각종 보상제도에 대한 충분한 홍보 및 활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협상의 전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견해가 존중돼야 한다. 전문가들이 오랜 시간 동안 거시적 관점에서 연구한 결과물이 일부 이익단체의 일방적 주장이나 시민단체들의 일시적인 선동으로 뒤집히는 사례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신빙성이 모호한 각종 예상 수치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실증적 예를 들어 예상 피해자들을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개방으로 인해 예상되는 피해는 다소 과장돼 있다는 실례가 한국 및 외국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의지다. 한.미 협상은 단기간에 민감 품목을 포함한 협상을 해야 하므로 많은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장기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이는 '과거사법'이나 '사학법' 개정에서 보여주었던 노력의 절반만 가지고도 무난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두원 연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