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의 여름나기 편지] 은을암에서 범종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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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울주군 척과리에 은을암(隱乙庵)란 신라 고찰이 있습니다.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이 새가 되어 숨은 곳이라는 충효의 전설이 전하는 곳입니다. 은을암도 새처럼 작은 절집인데 해발 600m가 넘는 국수산 정상 아래 눈썹처럼 아스라이 걸려 있습니다.

은을암에 걸려 있는 범종이 여간 명물이 아닙니다. 한 번 치면 종소리가 아주 오래 살아서 웅웅거립니다. 제가 듣기엔 신라의 에밀레종 소리 못지 않았습니다. 은을암 범종소리는 꿈틀 꿈틀 살아서 하늘과 땅을 깨우고, 그 소리 마지막엔 동해바다로 돌아가 푸른 연잎처럼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은을암을 찾는다면 그 범종을 한 번 쳐보시길. 절마다 범종은 치지 못하도록 종목을 꼭꼭 묵어놓았는데 은을암은 늘 풀려 있습니다. 종을 치다 스님께 야단 맞으면 어떻게 하느냐구요? 그 때는 제 이름을 파셔도 좋습니다. 은을암 주지 광석 스님과 저는 어릴 적부터 개구쟁이 친구 사이인지라 허허허 웃고 말 것입니다.

정일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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