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3인의 대화…간결하게 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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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신촌의 산울림 소극장에서는 소문 없이 매우 특이한 프랑스연극 한편이 공연되고 있다. 사건의 배제, 공간의 극단적인 간결성등의 추구로 인해 일본이나 미국의 연극계에서도 막 올리기를 주저한다는 『영국인 애인』(「마르그리트· 뒤라스」작· 임영웅연출· 7월10일까지) 이 그것이다.
「뒤라스」는 84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난해한 소설 『연인』으로 다소 낯익으나 그의 극작술은 우리 관객들에게는 생소함과 함께 충격으로 다가선다.
68년 프랑스에서 초연된 이 작품의 내용은 간단하다.
센에오아즈 지방에 살고 있는 50대의 한 여인이 그녀 대신 집안일을 보살피는 사촌 여동
샘을 살해한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시체를 토막낸 후 머리 부분만을 숨겨둔 채 나머지 부분들을 각기 다른 화물기차에 버린다. 프랑스 전역으로 흩어진 시체토막이 발견되면서 수사가 시작된다.
곧 토막시체를 운반한 여러 기차들이 공통적으로 통과한 지점이 바로 센에오아즈의 가교임이 밝혀지고 바로 이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음을 추정한 경찰은 어렵지 않게 범인을 체포한다.
연극은 수사관을 포함한 3명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살인자의 남편과 수사관의 대화(1막), 살인자와 수사관의 대화(2막)로 간결하게 처리된다.
그러나 작품은 「왜, 무엇 때문에」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수사극과는 달리 이미 일어난 살인사건의 재축조와는 무관하게 진행된다.
무대는 한 여인을 살인범으로 지목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해한 현대인에 대한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관객들 스스로가 존재 이면에 숨어있는 자신들의 참모습을 느끼려고 하는데 있다. 연극이 끝난 뒤에야 객석에서는 문자나 말로써 일관되게 표현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에 빛줄기 하나가 던져졌음을 깨닫게 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극도로 자제된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며, 최근 덤핑으로 오염된 우리 연극계에서 이만한 고급 연극이 아직 만들어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특수한 관극체험과 함께 즐거룸으로 남는다. <양헌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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