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정진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전회에서는 양장제책에 관해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호부장제책(책장을 모아 철사를 박은 다음표지를 싸바르는 제책 방식) 에 관한 이야기를 문정제책사의 박종호사장의 체험담을 중심으로 살퍼보자.
일제때 조선사람이 경영한 제책소는 네군데 있었다. 박월성 이병문 박복산 박해진이 그들. 그들은 대개 조선인쇄주식회사제책부 출신들로 시설이라야 재단기 한대씩이 유일했으며 상호도 달지못한 형편이었다. 자본금이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기계를 사들인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으며, 그저 손으로 발로 입으로 하는 식이었다.
철사기 대신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철사를 동강내어 하나하나 꿰어서 묶었다. 실로 꿰매어 만드는 소위 반양장의 경우에는 인쇄된 접지를 톱으로 썰어 실구멍을 내어서는 일일이 손으로 엮어맸다. 이 일은 점지를 달구지에 실어서 서울 변두리인 마포 아현동 신당동 자꿀 (현 청운동) 등지에 사는 아이들이나 아낙네들에게 풀어 맡겼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규모 인쇄소들이 자체 제본부에서 해내지 못하여 밀린 잔손 일감이나 아니면 조선인이 출판한 빨간딱지책의 인쇄물을 전기 네 사람들이 하도급을 맡아 변두리 사람들에게 풀어 맡긴 것이다.그러니 일제하에서의 우리 조선사람의 제책업이란 한마디로 가내공업이요, 수공업이였다.
박종호사장 역시 조선인쇄주식회사 제책부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대제책사의 증인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또한 오늘날 제책계에서는 드물게 만나는 학구파로, 대한출판문화협회 부실 편집인대학에서 「제본론」강의를 맡을정도로 기술과 이론에도 밝다.
나는 6·25전은 물론 환도후, 즉 50년대말까지만 해도 내가 경영하는 을유문화사와 거래하던 주요 제책공장읕 작업진행을 체크하기위해 돌아보는 기회가 많았었다. 대부분의 제책공장은 전화로 불타버린 빈터에 천막으로 지붕을 덮은 가건물이거나 파손될대로 파손된 건물이 고작이었다. 겨울이면 창문하나 제대로 막지 못했고 여름이면 천막 위를 내리쬐는 열기가 공원들을 괴롭혔다. 이런 작업환경 속에서 제책공들은 해방후 양산되기 시작한 각급 학교용 교과서와 학습참고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제책공으로는 부녀자가 절대다수였으니, 그들의 고통은 더욱 컸을 것이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제까지 사람의 손으로 하던 접지·뽑새(정합)·실꿰매기등 수공적 작업이 모두 자동화하고, 이들 각 공정이 컨베이어 시스팀으로 연결되어 전에 비해 혁신적인 자력화가 이루어졌으며, 생산능력에도 경이적인 증대를 가져와 제책에 소요되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키게되었다.
그러나 제책계는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박종호사장은 말한다.
『제책소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좋아서 하는 사람 없습니다. 여성제책공이 대다수인데, 특히 여자에게는 제책기술이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들 하거든요. 봉제 같은 일은 공장에서 퇴직하고 나서도 가사에 활용되는데, 제책기술은 제책소를 떠나고 나면 쓸모없게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다른 산업의 발달에 비하면 제책업의 인력난은 심각합니다. 따라서 이직률이 높기 때문에 기술의 축적은 기대할 수 없어요. 최신 기계를 도입하여 제책시설은 좋아졌지만 기술인력은 오히려 뒷걸음질칩니다』
이러한 실상을 볼때 문화재를 생산하는 중요한 기업인 제책업이 발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정책적인 배려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