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들국화로 必來(필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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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그들을 만난 건 2012년 7월 5일이었다.
자그마치 23년만의 재결성이었다.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자이기 전에 팬으로서의 설렘이었다.

그들의 촬영,
참 오랜 된 꿈이었다.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일,
꿈일 뿐이라 생각했었다.

뭘 해도 아팠던 청춘시절,
두툼한 솜이불 속에서 목이 터져라 불렀었다.
행진….
한치 앞도 뵈지 않던 현실, 그들의 노래 ‘행진’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지하의 연습실로 들어섰다.
주찬권·전인권·최성원, 그들이 거기 있었다.

인사를 건네며,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이 순간 팬이 아니라 기자여야만 했다.

속내를 드러내 자칫 주도권을 빼앗기면,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
기 센 그들, 그들의 센 기를 넘어서야 내 방식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인터뷰 중, 산이 그려졌다.
모래알 같이 흩어졌던 그들,
다시 뭉치니 산처럼 여겨졌다.

사진촬영을 위해 연습실로 들어섰다.

이미 예정된 인터뷰와 사진촬영 시간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셋이 연습실 가운데 섰다.
자리를 잡고 포즈를 취했으니 어서 사진을 찍으라는 무언의 신호 같았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었다.
일단 몇 장 찍었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셋이 뭉치니 산으로 여겨졌다. 들국화를 산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선뜻 호감을 보였다.
다행이었다.

일단 한 명이 의자에 앉고, 그 뒤에 한 명이 서서 얼굴을 포갠 다음, 그 다음에 한 명이 의자에 올라서서 얼굴을 포개라 했다.
최성원, 전인권, 주찬권의 순으로 그렇게 했다.

말처럼 쉽지 않았다.
예순을 앞둔 그들의 몸으로 얼굴을 포개는 일,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제일 윗자리,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고 했다.

의자 위에서 뒷짐지고 허리를 굽힌 자세, 젊은이도 만만치 않았을 터다.
억지로 참으며 해냈다.
그 자리, 당연히 주찬권의 몫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못했을 일이었다.

그 사진이 신문이 게재되었다.
그 후 연락이 왔다.
그 사진을 공연 포스터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사진 사용료로 포스터에 각자의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그 다음해, 10월 20일.
주찬권, 그가 돌연 쓰러졌다.
내겐 ‘들국화가 졌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인터뷰에서 그들이 밝혔다.
주찬권으로 인해 재결합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23년만의 재결합, 들국화의 연결고리였다.

그가 떠난 후, '들국화 4집‘ 앨범이 발매되었다.
그 중 ‘들국화로 必來(필래)’란 곡이 있다.

주찬권, 그는 떠나기 전날까지 이 곡의 코러스를 녹음했다고 했다.
그가 떠난 후, 최성원과 듀엣으로 재구성해 세상에 나온 게다.

들국화의 재결합을 주도하고, 떠나기 전날까지 ‘들국화로 必來(필래)’에 매달렸던 그다.

올해, 들국화 데뷔 30주년이다.
그리고 내일, 주찬권의 2주기다.

다시 가을이다.
여태 들국화는 必來하지 않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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