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2) 제80화 한일회담(241)-대표단 인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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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한일회담대표선정에 관해『순수한 관료출신만으로 채워야 정치적 고려없이 한일회담을 성사시킬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과거 자유당및 민주당시절 경무대비서관·주미대사·국회의원·전직장관 등이 포함된 거물급 대표단이 구성됐으나 늘 현안의 원점에서 법리만 따진 점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이장관도 내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해 우리는 쉽게 대표단을 인선했다.
내가 수석대표를 맡고 대표에 문철순 외무부기획관리실장(기본관계담당), 이규성 주일참사관(어업관계), 방희 주일공사(법적 지위관계), 연하귀 아주국장(수석대표보좌), 이경호 법무부법무국장, 이봉래 농림부수산국장, 김명년 농림부수산진흥원장을 내정했다.
이장관과 나는 그러나 문화재관계와 관련, 관료만으로는 도저히 일본측을 상대로 해서 우리의 수탈된 국보급 문화재를 재대로 찾아올 수는 없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사계권위자를 찾기로 했다.
당시 김재원박사가 국립박물관장으로 그 방면의 권위였으나 이장관과 나는 일본에 지면이 넓은 고대사학과교수 이홍직박사와 동국대 황수영교수(현 동국대총장)를 대표로 위촉키로 합의했다.
이미 말했듯이 이홍직박사는 일본측의 차석대표인「우시바」심의관과는 동경제대 동기동창으로 서로 친숙한 사이였다.
후일담이지만「우시바」씨는 이박사와의 관계 때문에 문부성관료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최선의 협조를 해서 문화재반환에 성의를 보였다고 나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나는 이같은 대표단구성을 통해 정치성을 극력 배제했고 지금 생각해봐도 그랬기 때문에 6개월이라는 시한에 대사를 치를 수 있지 않았나 평가한다.
즉 게릴라요원 없이 정규사단으로 전쟁을 치러 성공한 예라고나 할까.
대표단 인선이 완료된 후 이장관은 구체적 교섭지침을 제시했다.
청구권문제를 일별하면 우리측은 김-대평메모에 따라 청구권중 무상3억달러, 유상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를 협정에 꼭 명기토록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1억달러는 협정에 언급치 말자는 것이어서 장관의 지침은 명기를 관철하되 협정 이외의 형식으로 상호 인정하는 방식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지고있는 부채상환문제와 관련, 우리는 10년간에 걸쳐 무상3억달러에서 균등 상환하겠다는 입장인데 비해 일본측은 3년간에 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교섭한계지침은 3년간에 상환하되 무상3억달러의 일측 지불기간을 단축하여 실질적인 이해측면에서 상쇄하라는 논리였다.
청구권문제는 이에서 보듯 현안타결에 큰 문제가 될 소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어업문제에 달려있다는 것이 실무자들의 공통된 지적이었다.
일본측이 최대 쟁점으로 삼는 전관수역의 폭에 대해 우리측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되 그 문제로 회담이 깨진다면 그 책임을 우리가 뒤집어쓸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결렬이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공동 어로수역내의 어업규제조치의 내용을 일단 일본측이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제시하는 복안을 마련키로 했다. 이같은 실무적 차원의 전략협의를 거친후 박대통령 주재의 고위전략회의가 또 개최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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