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맥아더에서 제국주의까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맥아더 동상에 대한 대통령의 언급을 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다. 맥아더에 대한 평가가 전혀 없다. 핵심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아낸 그의 상륙작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다. 북한이나, 북한을 지지하는 쪽에서 보면 그가 공산화 통일을 막은 철천지원수일 것이고,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지켜준 은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대통령은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기껏해서 "동상을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한.미 관계를 관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것이 옳았느냐, 잘못됐느냐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고, 한.미 관계가 나빠지니까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원칙은 말하지 않고 전술만 얘기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헌법이 규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분의 동상을 허물면 안 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해야 한다.

▶ 문창극 논설주간

며칠 뒤 그는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세계 여러 분야에 남아 있는 제국주의적 사고와 잔재를 온전히 청산해야 한다"는 대목이었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100년 전의 제국주의론을 꺼냈을까. 그의 제국주의 언급과 맥아더에 대한 전술적 반응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국제정치학에서 제국주의론은 공산주의가 국제 관계를 보는 이론 틀이다. 그 출발은 마르크스에게서 시작되지만 레닌에 의해 다듬어져 공산주의 국가들의 대외정책으로 정착돼 1970년대까지 지속됐다. 공산주의가 국내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타도해야 지상낙원이 이뤄진다고 하듯이, 국제정치에서는 공산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해야 세계 평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독점 자본주의 국가는 생산원료와 소비시장을 위해 식민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세계에 자본주의 국가가 있는 한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일종의 필연론이다.

그러나 그 후 전개된 역사에 의해 제국주의론이 잘못된 이론이었음이 증명됐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독일의 라이벌 의식에서 비롯됐고, 제2차 세계대전은 공산주의 소련과 자본주의의 영.미가 연합해 히틀러와 싸운 전쟁이었다. 더 웃기는 일은 제국주의를 비난하던 소련이 동구를 위성국가화했고 체코는 물론 후진국인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무력까지 사용했다. 서구국가들은 그러한 소련을 두고 소련 제국주의라고 비난했다. 결국 제국주의는 공산주의가 사용한 정치적 구호였다.

흐루시초프 이후 제국주의론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했다. 제3세계를 공산권 영향에 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이 민족해방전쟁에 매달려 있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그들이 볼 때는 맥아더가 바로 민족해방을 막은 인물이고, 주한미군은 민족해방을 방해하는 제국주의 세력이다. 그래서 입만 열면 '미제 타도'를 외치는 것이다.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이렇게 민족을 해방(?)시키자는 사람들이니 여당의 핵심 간부가 그들 행동에 대해 "민족의 순수성을 깊이 평가한다"고 칭송한 모양이다. 대통령이 맥아더에 대해 평가를 유보하고 있는 이유 역시 이러한 인식과 맥이 닿은 때문은 아닐까.

사실 제국주의론에 뿌리를 둔 민족해방론이나, 종속이론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해 준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민족해방론자들이나 종속이론가들이 볼 때 한국은 독점자본국가인 미국의 착취대상 국가다. 그렇다면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 되던 나라가 불과 몇십 년 만에 세계 11위의 무역국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로 진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이 한국을 착취했다면 더 가난해져야 했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제3세계 국가들, 아니 민족해방전쟁을 부추기던 중.러까지도 한국을 배우려고 야단이다. 이런 성공한 나라의 대통령이 유엔에서 제국주의론을 펼칠 때 세계 정상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참으로 낯이 뜨거워진다.

이론은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현실이다. 이 땅에서 시대착오적인 민족해방전쟁을 펼치고자 하는 세력이 활개치고 있다. 민족해방의 종착점은 뻔하다. 그럼에도 지금의 권력은 이들을 제재하려 하지 않는다. 왜일까.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로 국민이 정신 차려야 한다. 나는 자유공원에서 온몸으로 동상을 지키고 있는 재향군인들, 자유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를 우리 힘으로 지킬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문창극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