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농 사회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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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형량의 차이는 있었지만 3심을 거치는 동안 돈을 받은데 대해서는 모두 유죄였고…어쨌든 이북의 돈을 받은 것이 사실인 이상 사형까지는 어떤지 몰라도 5년은 오히려 가벼운 형량이었다.
나의 사견으로는 죽산같은 이가 김일성 밑에 있을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죽산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해 <내가 김일성의 돈을 쓰뎌라도 뒤에 내가 그를 잡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었는지 모른다.
6·25직후의 분위기에서 김일성의 돈을 받았다는 것만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수 없었고 이것이 죽산의 한계였다. 진보당사건은 역사가 평가를 하겠지만 당시 담당검사로서는 국가존립의 문제가 걸려있다고 생각하고 법을 집행했다. 죽산이 당시 그런 주장을 펴기엔 6·25의 상처가 너무 깊었었다. 조검사는 죽산이나 진보당의 정치진로가 북한과의 합작으로 가고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진보당사건을 다루었던 당시의 경찰책임자도 이점에선 마찬가지 견해다.
『57∼58년의 기간에는 간첩활동이 극성스러웠다. 내가 책임자로 있던 1년여동안 서울시경에서만도 1백27건의 간첩을 적발했었다. 진보당사건은 그만큼 북은 소위 평화공세를 내세워 침투에 광분하고 있었다.
진보당은 북쪽의 공작 대장이 된것이다. 진보당 사건은 서울시경 대공분실에서 전담했다. 사건의 중대성 때문에 나도 두차례쯤 분실에 들러 죽산을 만났다. 어느 때인가 단둘이 만났을 때 죽산이 <이대롱령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었다. 그가 당시 죄를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한것인지 장관으로까지 기용한 이박사와 정치적으로 겨룬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미안하다고 한것인지 그 어느쪽인지를 지금도 짐작할수 없다.
아뭏든 죽산은 <내가 생각한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공산당의 함정에 빠질줄은 몰랐다>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내 느낌으로는 죽산은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노농사회주의자의 인상을 풍겼다. 어떻든 죽산은 스스로 중간적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공산당에 이용됐다는 것이 나의 심증이고 판단이었다』는 것이 사건을 지켜본 당시의 경찰수뇌측이던 H씨의 오늘의 회고다.
이처럼 수사당국의 고위관계자들은 죽산을 유죄로 주장하면서 죽산의 정치성향을 이북과의 합작으로는 보지않는다. 그러나 당시 죽산을 포함해 진보당 관계자들을 직접 심문하고 취조했던 경찰 실무진은 죽산은 공산주의 사상을 청산하지 않았다고 지금도 확언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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