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1백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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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태극기 사용 1백년을 맞았다. 체신부는 태극기를 그린우표 4백60만장을 발행, 이 해를 기념하기로 했다.
태극기는 임오군난의 뒷수습을 위한 수신사로서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 게양한 것이 효시다. 1882년9윌20일(음력 8월9일), 구한말 고종 19년의 일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됐음이 공식 반포됐다. 구한말 조정에서 국기제정의 필요성을 느끼게된 데는 두가지설이 전해진다. l875년 일본군함 운양호가 강화도에 침입, 우리 포낭의 공격을 받자 일본측은 왜 일본국기를 달았는데도 공격했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조정에서는 수비병들이 분간을 못할 수도 있다고 응수하긴 했으나 내심으론 국기의 중요성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또 한가지 설은 일본주재 청국공관의 참찬으로 있던 황준헌이 김홍집에게 전달한 『조선책략』에서 비롯된다. 황은 어 건의문에서 조선도 쇄국정책을 버리고 청·일과 「대등하게」조약을 맺을 것을 역설하며 국기를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 황은 국기의 모양과 색깔은 청의 용기를 본뜰 것까지 권고했다.
당시 열국의 각축장이 된 조선땅을 두고 청의 노회한 술수가 발휘된 것이다. 실제로 그후 청은 외교사절을 통해 색깔만 바꾼 용기의 사용을 강요하기도 했었다. 당시 우리가 자주성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는 태극기대신 삼각형의 용기를 국기로 가질 뻔했다.
태극마크가 박영효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님은 확실한 것같다. 이미 배에 탈때부터 태극과 팔괘의 도안을 사용하라고 조정의 지시를 받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신문에는 고종의 고안인 것처럼 보도된 적이 있다. 일설엔 청의 외교관 마건충의 발상이라는 설도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태극도형과 무척 친근했다는 것이다. l959년에 발굴된 신라 감은사지의 석재에서 이미 태극마크가 조각된 것이 발견됐다. 감은사는 송대의 주돈이가 태극도설을 발표하기 4백년전에 건축된 것이다. 당시 신라인은 용의 꿈틀거림을 상징하는 신비의 부호로 대극의 곡선을 창안한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 규장각에서 발견된 어기(국기) 는 사괘가 아닌 팔괘를, 태극속의 음양이 네차례 만나는 것으로 돼있다. 아마 현재의 태극기를 만들기 위한 원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태극마크는 우리고유의 것이라도 태극기전체가 주역의 이치대로 설명됨은 익히 아는 사실. 바탕의 백색은 평화, 원형은 단일, 청홍은 음양으로 창조정신, 건곤만감(건곤리감)의 사괘는 하늘, 땅, 불, 물의 자주생성원리를 나타낸다.
이만큼 깊은 사상을 함축한 국기도 세계에서 드물다. 근세의 민족수난과 함께 고락을 같이한 태극기의 참뜻은 널리 알릴수록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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