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고아 슬픔「그림」으로 이겨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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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전쟁고아로 굶주림과 고독의 절망을 캠퍼스위에 인간의지로 승화시킨 주인공이 있다.
82년도 제5회「중앙미술대전」대상수상자 이청운씨(32·서울동고동150의2)

<학비없어, 청강만>
수상작『구석』은 미술품으로서 갖는 시각적 가치 못지않게 작가이씨가 보여준 예술에의 집념과 축음보다 깊은 절망의 늪을 이겨낸 숭고한 인간정신의 승리가 담겨있기에 더 깊은 뜻을 갖고있다.
그는 부모가 누구인지 태어난 고향이 어디인지모른다. 탱크가 구르는 굉음, 줄을 이어 어디론가 떠나가던 피난민의 행렬뿐인 전쟁터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흘러든 그는 곧 그곳의 한고아원에 수용됐다. 수영국교시절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중학(빙영중학)에 진학하면서 부산시교육위원회주최 학생사생대회를 비롯한 굵직한 대회에서 연달아 입상하면서 능력를 인정받았다.
71년 원예고교가축과를 졸업하면서 동아대회화과에 입학했으나 제대로 등록금을 내지못해 청강생신세를 전전하다가 끝내중도에서 그만둘수 밖에없게됐다.
그가 서울행을 결심한것은 고아라는 이유로 군징집면제를 받고난 뒤었다. 폭넓은그림을 그리고 화가다운 화가가 되려면 고생이되더라도 서울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75년「의욕」하나로 맨주먹으로 서울에 온 그를 맨처음 맞이한 것은 배고픔이었다.
『이틀을 내리굶고나니 이상하게도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생겨나더군요. 몰래옆집 감자도 훔쳐먹고 하면서 기운을 차렸지요 그러나 이런 일들이 한달이면 몇차례씩 반복된데다 그럴때마다 고독이 더욱 무섭게 밀려와 나중에는 정신분열증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게다가 전시장을 기옷거려봐도 학연(학연)이나 지연(지연)이 없었다. 단 하나 생의 희망인그림을 그릴 도구마저없는 극한상황에 이르게됐다. 『거짓말이 필요악이라고 깨달은 것은 그때였어요. 망속동 관자촌에서 기식하면서 이대·홍대근처 화방에 가서 곧 갚겠노라며 도구를 챙겨들곤 그대로 줄행랑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그래서 그는 6년간 자신을 믿고 화구(화구)를 의장으로 대준 홍주화방의 이희돈씨를 잊지못한다.

<화구도 외상구입>
그가 당시에 그린 그림의 주제는 밤풍경.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나서면 남폿불 밑의포장마차 주인까지도 행복하게 여겨졌다. 이에등장한 검은색은 지금까지 그의 주조색이 되고있을정도로 당시의 참담함은 그의 내면에 깊게 자리잡았다.
한때는 자살을생각했다. 배고품속에 겨우겨우 그린 그림들이 줄곧 낙선하자『이러고도 계속 그림을 그릴것인가』에 회의를 느꼈다는것이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에서 강원도 탄광촌을 찾았지요. 그곳에서 언제 일어날지모를 죽음의 환경에 굴복치않고 열심히 사는 광부들을 보았습니다.』
이씨는 잠시나마 자살을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용기를 얻어 서울에 돌아와 착수한 작품이 바로『구석』이었다. 그것은 도시의 버려진 한모퉁이에서 열심히 삶을. 꾸려가는 장소였다.

<탄광서 용기얻어>
진한 회색톤과 굵은 검은선이 캔버스위에 미친듯이 춤췄다. 화필이 움직일때마다 강한 생명력이 솟아나는것 같았다.
79년 구상전에 첫선을보여 금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중앙미전특선, 80년기대되는「청년작가신인선」에 선정되는등 착실한 자기발전을해온 이씨는 드디어 제5회「중앙미전」(덕강궁연대미술관서16일까지전시)에서 예술에의 집념과 인간의지의 꽃을피운것이다.
『항상 방세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게 죄처럼 따라다녔어요. 그러나 그 혹심한 굶주림과 궁핍속에서 지내노라니 더욱 강인한 집념이 생기더군요』그는「없다」는 것을 표현하지 않을때 용기를 갖게되고 자연스럽고 떳떳해지며 이를 바탕으로 그림 역시 자신있게 그릴수 있다는 것을 그간의 신조로 삼아왔다고 했다.
이씨는『앞으로 4∼5년간 외국에 나가 판화등 유화이의의 외화공부를 해보고 싶은 것이꿈』이라며 밝고 크게 웃어보였다.<홍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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