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닭 대신 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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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큰아이가 '고3'이라서 피서도 반납했다. 돈 버리고 길에서 고생하느니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시원한 수박이나 실컷 먹으며 더위를 보내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작은아이는 저도 내년이면 고등학생이라서 지금 추억을 만들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며 바닷가행을 고집하고 나섰다. 하는 수 없이 충남 서산 몽산포의 큰 처형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들과 아내는 집에 남고, 나만 딸과 딸 친구들을 데리고 몽산포로 향했다. 장마 끝에 온 7월의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막히는 길을 게걸음으로 빠져 나와 가까스로 처형 댁에 도착했다.

칠순의 처형은 뙤약볕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를 따다가 자동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흙 묻은 발로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주셨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아내에게 큰 처형은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자녀 모두 결혼시켜 내보내고 혼자 터를 지키며 사셨다.

아이들은 물놀이 가고 나는 처형의 밭일을 도왔다. 처형은 손님도 왔는데 내놓을 반찬이 없다며 바닷가에 가서 조개를 좀 잡아 올 테니 그동안 닭 한 마리 잡아서 털을 뽑아놓으라고 하셨다.

"닭은 뭐하러 잡으시게요?"

"오늘이 초복이여, 그리고 사위가 오면 씨암탉 잡아준다잖여? 장모 대신잉께 내가 해주어야지"

처형은 닭.오리.토끼.개 등 웬만한 가축은 다 방목하고 있었다. 말씀은 고마웠지만 사실 시골에 살았어도 닭 한번 못 잡아본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밖에 나가 한가로이 모이를 찾는 닭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처형이 올 시간은 다 되었는데 어쩌나.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차를 몰고 읍내 장터를 뒤지다시피 하여 진열장에 옷을 벗고 요염하게 누워 있는 놈을 달라고 해서 급히 돌아왔다. 벌써 돌아와 있던 처형은 "닭은 안 잡고 어디 갔다 오느냐"고 나무라셨다. 슬그머니 사온 것을 내놓으니 "닭 잡으라니까 왜 오리는 잡아"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으셨다. 사온 걸 금방 아셨지만… 물놀이에 지친 아이들이 들이닥치고 가마솥에 마늘과 인삼을 넣고 푹 곤 오삼탕(?)을 내놓자 "역시 이모네 토종 닭 맛이 최고야"하며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원래 딸아이는 오리를 싫어하는데 말이다.

최병순(47.조경업.경기 안양시 평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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