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서독 탁구계 휩쓰는 이에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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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 이럴수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휴가를 기던 이에리사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첫마디는 차라리 신음이었다. 뼈를 깎는 고통을 억지로 잡아내듯 그는 한참동안 눈을 꼭 감았다.
「유고」「노비사드」의 제3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고 있는 한국 여자팀이 서전에서 서독에 3-2로 역전패 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 순간 이에리사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한국이 질 수도 없고 또 져서도 안 되는 팀이 서독인데요….』 오랜 침묵 끝에 이에리사는 힘겨운 듯 가냘프게 한마디했다.
「사라예보」의 영광이 담겨진 「유고」에서, 더우기 그 스스로가 코치 겸 선수로 활약하고있는 서독에 패했다는 사실을 이에리사가 믿으려 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서독의 탁구수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헝가리」때문에 결선에 올랐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역시 중공에는 초인적인 훈련과 연구가 필요하고요.』
작년 7월이래 「FTG 프랑크푸르트] 에서 활약중인 이에리사는 오는 9월까지의 시즌 오프를 맞아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고있다.
그 동안 이에리사는 「분데스·리가」의 판도를 뒤엎을 정도로 서독 탁구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79∼80년 시리즈에서 「분데스·리가」 6위에 그쳤던 「FTG 프랑크푸르트」를 80∼81년 시리즈에서 2위로 부상케 했고 81∼82년 시리즈에선 우승을 바라볼 정도로 그의 활약은 재론의 여지없이 절대적이다. 이에리사는 그러나 자신의 문제보다 항상 한국탁구의 장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힘으로 밀어 붙었던 서독 등 「유럽」의 탁구가 최근 들어 「아시아」 탁구의 스타일을 터득, 세밀한 기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걱정이 태산같다.
이러한 추세는 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 「유럽」탁구가 「아시아」를 능가할 날이 멀지 않아 닥쳐오리라는 것이 이에리사의 전망이다.
서독선수가 한국이나 중공으로부터 우수선수를 끈질기게 스카우트하면서 까지 기술도입을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안일하게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조짐의 일부가 이번에 나타난 것이라고 우리는 심각한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
이에리사의 「분데스·리가」생활은 몹시 바쁘다.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시즌엔 「분데스·리가」의 스케줄에 따라 주말마다 전국을 순회, 경기를 벌인다.
경기가 없는 날은 훈련 틈틈이 독일어를 배우고 자동차 운전을 익히는 등 개인적인 여러 가지 학습에 몰두하느라 시간을 쪼개 써야할 정도.
세계적 스타 플레이어였던 긍지 때문에 팀의 훈련시간엔 단 l분도 지각하는 일이 없고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과 지도에 전념한다.
가장 즐거운 일은 「이탈리아」에 있는 조혜정 언니를 가끔 만나러 가는 일』이라고.
이에리사는 「프랑크푸르트」 시 교외의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데 팀으로부터의 급료는 『생활비와 가끔의 개인 여행비를 충당하고도 얼마간 저축할 수 있을 정도』라며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다.
앞으로 체육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중이고 5월초 일시 귀국한다고. 【프랑크푸르트=이근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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