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증권시장|1.16 국책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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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간신히 걸음마를 시작하던 증시의 첫 번째 시련이 닥쳐왔다. 소위 1.16국책파동이다. 최초의 시련치고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과열된 투기매매로 증시는 파국을 치닫고 있었고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재무부장관은 급기야 58년1월16일 거래된 모든 매매의 무효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건은 비록 그날 터지긴 했어도 거슬러 올라가 몇 개월 전부터 이미 불씨가 잉태되고 있었다.
57년9월 재무부는 신년도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모자라는 세입충당을 위해 1백80억원의 11회 국채발행을 국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국회일어에서는 오히려 11회부터 국채발행을 중단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이 파동의 불씨가 될 줄이야. 만약 정부요청대로 11회 발행이 실시될 경우 중시의 국채가격은 당연히 내림세를 보일 것이고, 반대로 11회 이후 발행이 중단될 경우 공급량 부족으로 값이 뛸 것이 뻔했다.
특히 당시 증권회사들 가운데는 국회재경위원들과 밀착된 곳도 많았으므로 과연 얼마만큼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일은「사자」는 쪽에서부터 벌이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11회 국채발행계획이 거부될 것이라는 정보를 잡은 미화·제일·대창·내외·신영 등 5개 증권회사는 사정없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9월에 28국원(액면 1백원짜리)하는 것이 10월에 35원으로 올랐고 1l월 들어서도 시장은 계속 혼미를 거듭했다.
12월18일 국회 재경위는 「사자」측의 예상대로 1백80억원의 11회 국채발행 계획을 삭제해 버렸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증시시세는 폭등을 거듭했고 국채시세는 폭등을 거듭했고 국채시세는 40원까지 올랐다.
투자자들뿐 아니라 장안의 관심이 명동으로 쏠렸다. 이에 당황한 재무부는 여당인 자유당측과 연석회의를 가진 끝에 결국 정부안대로 11회 국채발행 계획을 부활시키기로 합의했고 그해 연말국회본회의에서 무수정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발행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해서 폭등했던 국채시세는 국회의 번복으로 하루아침에 역전, 이젠 폭락을 거듭했다.
이듬해 1월4일 신보대발회 날로부터 매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시세는 곤두박질을 쳐 9일에는 24원으로까지 내려갔다.
당황한 매방은 하락세를 멈추기 위해 완력매수작전이란 비상수법으로 나섰다. 싸게 사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비싼 값을 마구 불러 내림질 치던 시세를 다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시장은 뒤죽박죽이었고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이었다. 극심한 등락 속에 매방의 역습이 위력을 발휘해 16일 후장 들어서는 45원까지 다시 치솟았다.
사태가 이쯤 되자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던 거래소측은 긴급이사회를 열어 약정대금의 50%를 17일 상오 10시까지 납부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뒤늦게 진화작업에 나섰으나 이미 솟을 대로 솟은 불길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계속되다가 증시가 파국이라고 판단한 김현철 재무부장관은 결국 16일 매매된 국채거래를 모두 취소시킨다는 발표를 했다.
그 발표가 있던 17일 새벽1시쯤 재무부장관 비서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태수습안을 마련해 아침 7시까지 장관실로 출두하라는 전갈이었다.
장관실에는 김장관과 천병규차관, 김종대이재국장, 유찬거래소이사장, 박의순상무 등이 충혈 된 눈으로 나와 있었다.
장시간 머리를 맞대었지만 뾰족한 수습안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필자가 『조선증시취인소령 68조에 의해 주무장관의 감독명령권을 발동, 1월11일자 거래분 전량을 취소하자』고 건의했다.
김장관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하라고 단안을 내렸다.
그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거래를 무효선언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증시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비난도 비등했다.
그러나 그 같은 비상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찌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사자」와 「필자」 어느 한쪽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야 끝나는 전쟁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 후「사자」를 주도했던 미화·제일·내외·대창 등 4개 증권회사가 증권업 면허취소조치를 당했고 거래소측의 책임도 물어 이사장 이하 모든 임원이 경질되었다.
새로 2대 이사장에 윤인상씨가 취임했고 이때 필자도 재무부를 떠나 거래소에 몸을 담게되었다.
1.16국채파동으로 증시는 지울 수 없는 깊은 흉터를 남겼고 그 후유증도 대단했다.
재무부장관의 무효선언이 무효라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 내외증권측의 소송제기로 결국 법정으로까지 시비가 옮겨졌다. 근1년 동안을 끌던 재판은 다행히 원고측의 패소로 끝났으나 그것으로 아물기에는 너무 깊은 상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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