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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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한가위를 맞는다.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처신이야 여하튼, 철마다 회귀하는 자연의 순환은 엄숙하리만큼 정확하다.
명절을 쇤다는 것은 바로 그런 어김없는 섭리의 운행을 관조하자는 것일 게다.
살다보면 사람들은, 흔히 참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허상의 풍요」속에 스스로를 매몰하기 쉽다.
한가위의 명절은 이를테면 그런 일 「허상의 풍요」에서 깨어나 진실로 풍요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재발견하는 감식의 계기로 보고싶다.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는 지난 한해동안 열심히 살았고 제나름대로의 수확을 쌓았다.
그러나 수확이라 해서 다 똑같은 수확일 수는 없다.
진정으로 자부할만하고 진심으로 감사할만한 수확이 있는가 하면 조상과 하늘을 우러러보기에 부끄러운 수확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진보된 수확과 허상의 풍요를 양심껏 판별하여, 자괴할 것은 버리고 값진 것만을 향유하라고 하는 민족예지의 표현이 다름 아닌 한가위의 뜻이라 새겨야 할 것이다.
이 명절은 그래서 하늘과 조상과 이웃과의 매듭을 푸는 화해의 성사요, 연대의 의식이며 쇄신의 축제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 봄·여름 우리는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폐허에 뜨거운 동포애와 부흥의 열매를 맺어 놓았다.
그 참담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시가지는 일신되었고 넓은 들녘엔 황금빛 오곡이 물결치고 있다. 차례상을 물린 뒤 가족과 이웃이 둘러앉아 마음껏 자축하고 감사할만한 수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난 봄·여름에 우리가 사는 공동체 안에선 또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가.
한 가난하지 않은 탕아가 무고한 사람 셋을 한꺼번에 살해한 참사. 가까스로 생환했던 어린 소녀를 두 번째로 납치했던 수치스런 사건. 어줍잖은 이유로 남을 속이고 아픔을 주고 해코지 한 온갖 적악들.
이 적악들은 하나같이 다 「잘살기 위해」 저지른 일들이라 변명되곤 했다. 심지어는 범죄를 한 이유가 추석을 쉬기 위해서였다고 풀이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세상사람의 눈에 미처 띄지 않은 그 밖의 부정한 수확 또한 적잖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잘 살기 위한 짓이었기로 이런 부정한 수확마저도 우리가 희희낙락 향유의 대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그런 것일진댄 그 「잘살기 위해」라는 편리한 구실 자체도 차제에 한번 차분히 재음미해봐야 하겠다.
잘 산다는 것은 옳게 산다는 것의 연장이자 수단이지 그 반대여서는 안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 아무리 큰 수확을 거두었다해도 그것이 「옳게 사는 자세와 따로따로라면 그런 수확은 허상의 풍요일 뿐이다.
허상의 풍요는 인간을 더욱더 왜소하게 만들고 빈 껍질의 삶만을 살찌운다.
한가위의 차례상과 성묘와 음복에 참례하기 앞서 각자는 먼저 자기의 수확이 진실로 「인간다움」에 바탕했는지부터 경건히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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