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푸리」행 야간열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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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3년 전 인도여행에서는 꽤 오랫동안 북부를 비롯한 내륙지방을 다녔기에 이번 여행에서는 주로 해안지방을 여행하기로 했다. 「뱅골」만을 따라 최남단으로 내려가서 다시 서해안을 따라 「봄베이」까지 올라가면서 「데칸」고원 내부까지를 살피고자 자료들을 수집했다.
게다가 북쪽 국경지대까지 가는 특별 허가서를 신청했더니 뜻밖에도 선선히 내주었는데 당국에서는 필자가 교육에 종사하는 신분이라고 특별대우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갠지스」강에서 「간디」를 상상하며 그 성수에 목욕을 하고는「캘커타」로 돌아와서 밤에 「뱅골」만에 있는 남쪽의 「푸리」로 우선 가기 위하여 야간 열차를 탔다. 이 차는 놀랍게도 범죄 따위를 막기 위해 선지 차창에 땜질로 장살을 붙였는데, 밖에서 보면 흡사 죄수수송차와도 같았다. 첫 눈에 빈곤이 얼마나 그 나라를 비참하게 하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힌두」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로 순화되어 있기 때문에 살인율이 가장 높다는 남미의 「콜롬비아」나 「갱」이 많다는 미국처럼 그리 큰 범죄는 없다지만 열차에까지 차창에 창살을 대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나라의 사회질서가 어떻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구걸족에게서 동냥을 요구하는 일을 많이 받아 왔지만 국민들은 거의 성자다운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동안 신문같은 데서도 큰 범죄사건이 보도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차창의 창살은 아마도 열차 「갱」이 아니라 절도 따위를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캘커타」∼「푸리」「익스프레스」는 1, 2등밖에 없는데 우리 나라와는 달리「컴파트」식으로서 옆으로 통로가 나있고 선반은 자리만큼이나 크다. 이 나라 사람은 무슨 재화를 늘 갖고 다니는지 짐 보따리들이 많다. 내가 탄 2등 칸에서는 공교롭게도 내 자리 바로 위의 선반에 사람이 올라탔는데 맨발로 다니는 서민이다. 이가 많은지 연방 옷안에 손을 넣어 긁적긁적 긁는데 딱 질색이었다.
남쪽인 「푸리」까지 499㎞를 12시간20분이나 걸렸는데 그동안 멎는 역마다 차(다) 장수며 「포터」(짐꾼)들이 들끓고 더구나 밤중인데도 구걸족들이「플랫폼」에 까지 와서 『박쉬쉬!』(한푼 보태주십시오)를 되뇌면서 졸라대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10명에 한명 꼴은 되는 듯 하다. 「푸리」역내도 「컬커타」못지 않게 사람들이 들끓고 구걸족들이 또 한 많다. 「푸리」에 내리자마자 「힌두」교의 사대 순례지의 하나인 「자간나트」사원을 찾았다. 이 곳은 「자간나트」제로 유명한데 6월에 베풀어지기 때문에 볼 수 없으나 매우 열광적이라고 한다. 본산인 「자간나트」사원 앞의 대로를 신상을 태운 큰 차가 군중 속을 지나갈 때 옛날에는 일부러 그 차바퀴에 깔려 순사 하는 사람이 있었던 만큼 「힌두」교의 신앙은 광신적이라고 한다. 딴 사원에 비하여 화려하지 않으며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신성하게 보이지 않는다.
불교사원은 속세와 동떨어져 있지만 「힌두」사원이 거의 다 그렇듯이 이 사원도 도시 안에 있어서 바로 그 주변에는 상점이며 노점이 즐비하여 사람들이 들끓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광객들에게 돈을 요구하느라고 구걸족들이 사원 앞에 서성거리고 있으니 거룩한 사원은 이러한 분위기로 더럽혀지고 있는 셈이다.
이 사원 앞에서 바구니에 꽂을 담아다가 파는 예쁜 소녀가 보이기에 인사를 건넸더니 반기면서 꽃송이 하나를 팔아 달라는 것이다. 「힌두」사원에 참례하러 가는 사람은 으례 꽃을 바치므로 이런 사원 앞에는 꽃장수가 많다. 이 소녀는 인도여성 특유의 명상적인 큰 눈에다 콧날이 선 아주 사랑스러운 얼굴이지만 맨발로 다녀서 발이 거칠어진 것이 측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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