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엔 주인공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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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제3회「아시아」예술「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평론가「R·M·알베레스」씨가 28일 하오 신문회관 강당에서 「한국문학」지 창간 1주년기념특별 문학강연회를 가졌다. 『전후 50년대 이래의 「프랑스」소설』이라는 제목의 이 강연에서 「알베레스」씨는 최근 「유럽」이 문단의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른바 『주인공 없는 소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시도했다. 다음은 그 강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
작중인물이 없는 소설이라고 하면 하나의 역설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10여년에 걸쳐 그 수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필립·솔레르」의 『드라머』, 「장·티보드」의 『서곡』과 『밤을 상상하라』, 「장·리카르두」의 『작은 혁명』, 「엘렌·시크송」의 『중립』, 「르·콜레지오」의『전쟁』등이 그것이다. 작중 인물이 현저하게 유형화되고 개성화 되었던 19세기의 소설, 전통적으로 현실주의 또는 자연주의라고 불려지는 소설 이후로 인물로 하여금 <비개성화>의 길을 밟게 하는 어떤 변화의 흐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심리학 소멸 따라>
비개성화의 최초의 예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카프카」가 될 것이며 그것은 가령 『소송』파 같은 널리 알려진 작품 속에서 쉽사리 발견된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이름조차도 모르는 한 주인공을 만나게 되는바 그는 K라는 머릿글자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에 대해서 독자가 아무 것도 알 수 없음에 비해 「발자크」나 「졸라」는 주인공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으며 주인공을 조상과 출신가문으로 설명하곤 했었다.
「카프카」의 소설은 당시 하나의 예의적인 작품이었으며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소송』이 불어로 번역된 것은 1938년에 이르러서였으나 이미 양차대전 간에 현실주의소설에 대응하는 그리하여 한정 지어지지 않은 인물들을 제시하는 하나의 경향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향이 확립되는 것은 1950년 이후 「누브·로망」 그리고 신「누브·로망」과 더불어서 였다. 「로브·그리예」의 어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인물이 사라졌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 『견자』에서 우리는 단지 주인공의 머리 속에 스쳐가는「이미지」를 보았을 뿐인데 이 영상들은 상호 관련지어지지 않는 형태 모를 영상들로 써서 그의 성격을 형성하지도 않거니와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이렇듯 인물의 개념은 전통적인 심리학의 소설과 더불어 악화돼가고 있다.

<전후는「행로」의 소설>
인물없는 소설은 사실상 <행로>의 소설이다.
그러기에 「새뮤얼·베케트」에 있어서는 걷는, 그리고 보지 않는 인간이 묘사돼 있다. 이 같은 주제는 보편화되어 갔으며 「르·클레지오」는 『걷는 인간』이란 제목의 글 가운데서 「뉘앙스」와 더불어 충실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편 「망디아르그」의 작품『여백』의 주인공도 도시에서 걸어가며 『견자』의 「마티아」는 마치 『지우개』의 「발라스」가 도시에서 걷듯이 섬에서 걸어 다닌다.
지금까지 우리는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주인공이 비개성화된 나머지 작중 인물로 간주될 수 없고 다만 일련의 영상의 받침대, 유기적 개성이 박탈된 받침대의 구실로 화한 예만을 고찰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참된 인물 없는 소설의 경우도 존재한다. 이 소설의 최초의 예 중의 하나는 1965년 「필립·솔레르」의 『드라머』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계속되는 영상·전진·움직임으로서 우리는 그 안에서 풍경, 때로는 그림자들을 보는바, 그것들은 서로 연결됨으로써 한 이야기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인물에 집착 안 해>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이 될 것인가. 다름 아닌 언어의 움직임, 세계를 인지하기 위한 움직임이라 할 수 있는 인상의 한 연속, 따라서 이것은 모든 이야기에 앞서 일어나는 것이다. 정녕 이러한 이유에서 1966년 「쟝·티보드」는 제목으로서 『서곡』이란 말을 택하였다. 『서곡』은 결국 한 소설이 아니라 소설의 <서곡>인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 속에 바다·물·해변·도시…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 끝에 가서 새로운 잠 속에 떨어져 들어간다.
이 같이 여러 가지 예를 통하여 작중 인물 없는 소설이란 개념은 흔히 하나의 역설, 극단으로 보일 수도 있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사실상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특징이 갖가지 소설적 영감 속에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물 없는 소설은 창의적 수법이 아니라 기술의 한 필연성이 되는 것이다.
소설가는 형성되어가고 있는 세계 의식에 투영되기 시작하는 세계를 어떤 우화적인 인물에 굳이 집중시키지 않고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R·M·알베레스」씨 약력>
▲1921년 「피레네」출생
▲44년 「에콜·노르말·쉬폐리에르」졸업
▲52년 「붸노스 아이레스」 문과대학 교수
▲55년 「플로렌스」의 「프랑스」학원 교수
▲57년 「장·지로두」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 받음(파리)
▲63년 「프리부르」대 (스위스)문과대 교수
▲69년 「프랑스」「오를레앙」대 교수(현)
▲주요저서=『셍텍쥐페리』(48) 『20세기의 지적모험』(50) 『「앙드레·지드」의 「오디세이」』(51) 『장·폴·사르트르』(54) 『20세기의 문예적 평가』(56) 『현대소설사』(62) 『문학·수평선 20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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