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어떤 우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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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호 30면

금요일 저녁 강남역 11번 출구 앞은 사람의 파도로 넘실거린다.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려는 청춘들이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거나 기다리는 사람을 찾느라 북적대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을 한 번도 만나 적이 없다. 책에 실린 사진을 보긴 했지만 수많은 군중 속에서 사진 속 인물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때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캐리커처와 똑같네요.” 그는 내 책 『슈슈』를 읽은 적이 있는데 표지에 그려져 있는 캐리커처를 보고 단박에 알아봤다고 한다. 이강훈 작가의 솜씨도 빼어났겠지만 선생의 눈썰미가 탁월했던 것이리라.

김보일 선생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또 왕성한 독서가이자 여러권의 책을 쓴 작가다. PC통신 시절에 이미 그는 글 잘 쓰는 이로 유명했다. 일찍부터 마음으로 따르던 분을 만날 기대로 너무 흥분한 것일까? 일주일 전부터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더니 급기야 숨이 가빴다. 천식이 도진 것이다. 나는 약속을 연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만나기로 했다. 한번 연기한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기도 하니까.

천식 때문에 술은 못하고 저녁만 먹었다. 요즘 시를 쓰고 있다고, 꿈을 많이 꾸는데 꿈 속에서 이미지가, 시적 영감이, 환상이 넘친다고, 자신의 시는 그것을 받아 적는 것이라고 선생은 말한다. 그는 내 글에서도 환상이 보인다면서 환상을 한번 써보라고 권한다.

선생은 내게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물었는데 나는 보르헤스의 단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고 대답한다. 어렸을 때 친구 집에 갔다가 본 것인데 그것은 삼성판 세계문학전집 중 하나로 『세계단편문학선 3』에 수록되어 있던 작품이었다고, 당시의 제목은 ‘교차하는 소로의 정원’이었는데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가능성의 시간들이 존재한다는 발상이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고, 그러니까 어떤 시간 속에서 선생과 나는 함께 존재하지만 다른 시간 속에서 선생은 있고 나는 없거나 나는 있고 선생은 없고 또 다른 시간의 경우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고 나는 선생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떠든다.

선생은 내게 혹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어보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읽어보지 못했으며 브라우티건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말한다. 어쩌면 다른 시간 속에서는 그 책을 읽었을지도 모르죠, 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떠올리며. 선생은 브라우티건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그리고 박정대의 시 몇 구절과 로맹 가리의 소설 『새벽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다음날 오후 나는 박수진 작가와 이강훈 작가의 ‘수상한 질감’ 전시회에 갔다. 문학적 영감으로 가득한 전시회에서 그들이 그리고 쓴 『구멍은 구멍이고 구멍이다』라는 소설을 보았다. 그것은 여러 소설의 첫 문장으로만 이루어진 소설이었는데 16쪽에는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과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의 첫 문장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마치 선생과 내가 『구멍은 구멍이고 구멍이다』에 쓰인 그 대목들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말이다. 보르헤스의 소설 속에서 유춘은 이렇게 말한다. “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요.”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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