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 결혼 앞둔 아들에게도 살림살이 '신랑 수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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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팩은 꼭 물에 씻어서 분리배출 하는 것 알지 !

▶ 공과금 내러 은행 가면 자동납부기계 써야 하고

예식장, 웨딩드레스, 신부 화장, 예단.예물, 신혼집 꾸미기…. 결혼준비를 돕는 인터넷 사이트에 그득한 항목들이다. 예비 부부는 이것만 챙겨도 충분히 바쁘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보자. 무언가 중요한 게 빠져 있지나 않은지. 형식에만 치우친 나머지 본질적인 준비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결혼은 두 성인이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 모델하우스 같이 꾸민 집에 들어가는 게 전부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막상 결혼 준비에 바쁘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10주간 '어른 되기'를 교육한 어머니가 있다.

"레인지 후드를 본체에서 떼어내 봐라. 그래, 안쪽을 더듬으면 후크가 있지. 필터에 기름때가 많이 끼어 있지? 요리를 많이 할 경우엔 두세 달에 한 번쯤 교환해줘야 한단다. 마트에서 살 수 있어."

박복남(55)씨는 지난 1월 외아들(32)을 장가 보냈다. 결혼을 앞두고 세 식구가 모두 바빴다. 두 달간 주말마다 살림의 기본을 가르치고 배웠기 때문이다. 박씨는 새로 독립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부터 순서대로 '교과 과정'을 짰다. 쓰레기 분리배출이나 싱크대 거름망 정리와 같은 청소 요령에는 본인이, 차량관리법이나 부동산 계약서 보는 법에는 남편이 '강사'로 나섰다.

"제가 시집갈 때야 된장찌개 끓이기나 연탄갈기 정도만 알고 갔죠. 살림살이의 기본틀은 배울 기회가 없어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아이들은 좀더 쉽게, 기본은 배우고 출발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어요."

주위의 신부수업 강좌라는 것은 사실상 요리교실 정도다. 박씨에겐 먹는 것이나 집 꾸미기가 결혼 생활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싶었다.

"밥 먹는 건 오히려 부수적인 문제예요. 사먹을 수도 있고…. 새 가정을 꾸미는 데는 물건만 필요한 게 아니라 알아야 할 것도 많고요. 살림은 남에게 맡길 수만은 없는 부분이 있어요."

일단 아들을 위해 큼직한 앞치마를 준비했다. 살림에는 무궁무진한 묘수가 있다는 게 박씨의 생각이다. 아들은 빨래를 널 때부터 옷걸이에 걸어 말리면 다림질을 생략하고 바로 옷장에 걸 수 있는 생활의 지혜를 속성으로 배웠다. 박씨는 아들에게 "이불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베란다에 널어 털고 햇볕을 쐬 두어라. 힘 좋은 네가 하는 게 좋겠다"며 며느리에 대한 배려도 빼놓지 않았다.

딱히 '신랑수업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박씨는 딸을 시집보내는 입장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강조했다. 며느리(27)에겐 부담을 주기 싫어 아들의 살림 교육을 비밀로 했다. 결혼 후 며느리에게 딱 한 번 "살림하기 힘들지?"라고 넌지시 물어봤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 "어머니 신기해요. 남편이 살림을 참 잘 알아요." 박씨는 가슴이 뿌듯했다고 한다.

아들은 "이렇게 중요한 걸 왜 학교에서는 안 가르쳐줬는지 몰라요"라며 열심이었다. "맞벌이 부부가 이런 걸 다 챙기려면 간단치 않겠어요. 그동안 어머니께서 고생 많으셨네요"라는 말에는 뭉클해지기도 했다.

"아들뿐 아니라 저희 부부도 한 사람을 가족으로 맞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어른으로서 자세가 돼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어요."

친구들과 모임에서 '신랑 수업' 얘기를 하자 "생각도 못했던 일이네. 뭐뭐 가르쳤는지 적어달라.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호응을 얻었다.

"당사자든 혼주든 결혼준비를 하면서 예식장이나 가구 같이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정작 자신이 어른될 준비가 돼 있는지 돌아보는 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사회에서 결혼문화를 바꿀 수 있는 열쇠는 결혼 당사자들보다는 혼주들이 쥐고 있지요. 특히 시부모가 달라져야 한다고 봐요."

먼저 달라진 시부모의 충고가 우리의 결혼문화를 어떻게 바꿔갈지 두고볼 일이다.

최근 들어 결혼 문화를 개선하려는 혼주들의 노력도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결혼문화연구소 임선영씨는 "양가 어른들의 주도로 예물.예단.함들이 등의 형식을 생략하고 절약한 비용으로 공동 명의의 집을 얻는 일이 많다"고 말한다. 또 아름다운 재단 박고운 간사는 "아버지(64) 한 분이 찾아와 '아들 결혼 축의금 일부와 주례가 사양하고 간 사례금'이라며 기부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아름다운 재단은 '웨딩 1%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축의금의 1%를 소외된 이웃을 위해 쓸 것을 권하고 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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