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무성영화시대(2)|신일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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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춘사가 각본·감독·주연까지 맡은 명작 『아리랑』은 드디어 1926년 9월1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4개월만에 만들어진 『아리랑』이 개봉되자 서울장안의 화제는 모두 이 영화에 집중했고 관객은 문자 그대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영화관 앞에 기마순사가 동원되기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관객이 밀린 단성사는 문짝이 부서지기까지 했다. 극장 안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도 없게 초만원이었고 어린애를 데려온 관객은 꼼짝할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오줌을 뉘어야 하는 등 큰 혼잡을 이뤘다.
『아리랑』은 그 후에도 계속인기를 끌어 전국방방곡곡 안간 곳이 없고, 심지어 극장이 없는 시골에서는 가설극장까지 지어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던 것이다.
이때 흥행사는 임수호씨였다. 그당시 흥행사중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길거리에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길가던 사람들이 한참씩 뒤돌아 보며 넋을 놓고 구경하던 시절이었다.
처음 『아리랑』을 제작한 사람은 「요도」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서울과 지방의 1회 흥행에서 밑천을 다 뽑고 흥행권을 비싼 값에 임수호씨에게 팔아 넘겼던 것이다. 『아리랑』의 흥행권을 산 임씨는 이때의 수입으로 해방전까지 흥행계를 주름잡았으니 『아리랑』의 「히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아리랑』이 개봉되기 전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나운규선생은 무척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조선 「키네마」사의 사무실에 이규설·남궁운·주인규씨 등과 나를 모아놓고 분통이 치밀어 눈물을 흘리며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그대로 들이켜기만 했다. 갖은 까다로운 검열을 통과, 『아리랑』이 개봉되던 첫날 나선생과 제작진, 그리고 나는 본정통(지금의 충무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가슴을 졸이며 상영의 반향을 기다리고있었다.
이때 단성사에 알아보러 갔던 사람이 돌아와 초만원의 대성공이라는 희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듣고 책상을 치면서 몸을 일으킨 나선생은 나를 꼭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인해 보려고 단성사로 달려갔다.
춘사는 나라 잃은 민족의 울분을 담은 이『아리랑』을 검열에 통과시키기 위해 각본을 일인의 명의로 했다. 조선「키네마」사의 제작부장이던 「쓰모리」(진수)에게 김창선이란 한국이름을 붙여 줘 발표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봉직전에, 뿌린 선전전단은 일경에 의해 압수 당했고 나중에는 전단중에 「아리랑」노래가사부분만 도려내고 돌리게 했다.
『아리랑』의 첫「커트」는 두 사람이 「클로스·업」되어 마주쳐다보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한복을 입은 미치광이었고 또 하나는 「도리우찌」에 몽당수염을 기른 양복의 사나이가 화면 가득히 찼다. 이어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이 비쳐졌다. 바로 영화「아리랑」의 사상을 한「신」에 집약시킨 「프롤로그」였다.
아리랑고개 아랫마을에 철학을 공부하다 미친 영진(나운규 분)이란 사나이가 그의 아버지 (이규설 분)와 여동생 영희(신일선 분)와 같이 살고있었다.
그 마을에 영진의 친구며 영희와는 사랑하는 사이인 현구(남궁운 분)가 서울서 내려온다.
며칠 후 마을에는 풍년제가 벌어진다. 마을사람들이 고깔을 쓰고 흥겹게 노는 틈에 항상 영희를 노리고 있던 그 마을 악질지주의 청지기인 기호(주인규 분)가 영희를 겁탈하려든다.
이러한 위기에 현구가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지만 기호에게 쓰러지고 만다.
이때 낫으로 세숫대야를 두드리며 아리랑노래를 부르던 영진이 달려와 기호를 낫으로 찔러 죽인다. 영진은 피를 보고야 제 정신이 들지만 이미 그의 손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진다.
일경에 끌려 아리랑고개 너머로 사라져 가는 영진의 뒷모습에 영희·현구 등 마을사람들이 아리랑노래를 목메어 부른다.
단성사에서 『아리랑』이 개봉되었을 때 주제가인 민요 「아리랑」을 부른 가수는 이정숙씨였다. 이 노래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불려졌을 때 관객치고 통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 영화 1편으로 나 선생과 나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고 볼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오늘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바로 이 영화에 출연했던 인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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