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교양] '대한민국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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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史/한홍구, 한겨레신문사, 1만1천원

'유연한 사고를 지닌 저자의 심지(心志)굳은 역사서'. 책을 완독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느낌이다. 역사에서 객관적인 서술이란 있을 수 없다. 역사적인 사실은 분명 하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우리 눈으로 보면 의사(義士)지만 일본 제국주의자에게는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성공회대 교수인 저자는 "그래서 역사는 골치 아프다"면서 "결국 문제는 역사를 보는 관점과 기준이며 그 판단까지도 의심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런 자세 덕에 책은 우리가 현재 처한 문제에 호소력 있는 해법을 제공한다. 친일파 문제를 보자. 얼마 전 건국대 학생들은 현승종 전 총리의 이사장 취임을 반대했다. 반대 논거 중 하나는 현씨가 일제 때 학병에 지원한 친일파라는 것.

그러나 당시 학병은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기 때문에 현씨를 '친일'로 몰아붙인 건 무리한 논리였다. 친일잔재 청산을 둘러싸고 이같은 오류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프랑스 방식을 본받자는 주장도 저자는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프랑스는 4년여의 나치 점령이 끝난 뒤 부역자 7천여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런데 왜 우리는 36년이나 당했는데도 단 한명도 처형하지 못했는가라고 통분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저자는 '제국주의 통치가 오래될수록 협력자에 대한 처벌문제도 어렵다'면서 차분해지자고 권한다. 물론 친일문제를 덮자는 건 절대 아니다. 과거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의 편벽되지 않은 균형감각은 건강한 보수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게 근현대사의 가장 큰 불행이라는 탄식에서 절정에 이른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도덕성.일관성.책임감.지혜라는 덕목을 갖는다. 대표적인 예가 구한말의 사대부인 이건창과 황현. 당대의 문장가였던 두 사람은 동학교도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신분적인 한계 때문에 이를 극력 반대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이 못견뎌한 것은 개화 자체가 아니라 개화파의 부박함이었다. 김옥균의 경솔함, 미국 시민이 돼 돌아온 서재필이 임금 앞에서 뒷짐을 지는 것 같은 '뿌리없는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위정척사파의 고루한 폐쇄주의와는 달랐다. 이건창은 고종이 높은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거부했다. 고종의 대내외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고종이 벼슬과 유배 중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자 이건창은 기꺼이 귀양길을 택했다.

황현은 나라가 망하는 날 '수치스럽다'며 음독해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정녕 지켜야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속이지 않는 태도가 보수주의의 핵이다.

해방 이후엔 함석헌.장준하.문익환.계훈제 등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민족분단의 상황에서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려 싸우다 보니 탄압 받고 고통을 당하게 됐다.

그러기에 '지켜야 할 것'을 위해 기득권을 버린 적도, 희생한 적도 없는 요즘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가당찮은 족속'일 뿐이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보수와 수구는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두부 자르듯 참과 거짓으로 분명히 나누기가 어렵고 그 '경계에서 사유하기'가 중요하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그건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절충적 관점과는 다르다. 그러기에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 '병영국가 대한민국' 등 26개 테마로 정리한 글의 근저에 깔린 것은 '역사를 살다 간 이들에 대한 애정과 현실에 대한 뜨거운 피'다.

현대사를 다룬 이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독선적 태도를 균형잡힌 글쓰기로 피해간 점이 돋보인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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