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기억의 싱크로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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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호 30면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오는 문장이다.

기억은 언제나 틀린다. 얼마 전 나는 대학 후배가 나에 대해 쓴 글을 읽고 놀랐다. 그의 기억은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가령 그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혹시 『데미안』 읽어봤어요?”라고 내게 시비를 걸듯 물었고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고 썼지만 내 기억은 전혀 다르다. 그는 예의 바르고 수줍은 청년이라 누구에게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질문은 내가 그에게 한 것이고 그저 웃은 사람 역시 내가 아니라 그였다.

또 그는 이렇게 썼다. “형은 대학문화상에 당선되었고 다음해는 동국대문화상에 당선되었다. ‘풍장’이라는 시였다. 심사위원이 신경림 시인이었는데, 학생의 시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극찬을 한 시였다. 덕분에 당선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나는 신경림 시인의 바로 옆에 앉는 영광을 누렸었다.”

내 기억에 그 상의 이름은 ‘동대문학상’이었고 수상작도 ‘고양이’라는 다른 시였다. 또 신경림 시인이 심사위원 중 한 분이긴 했으나 그런 칭찬을 한 적은 없다. 오히려 시인은 다른 응모자의 작품을 더 좋아했다고 들었다. 다른 심사위원이 하도 좋아하고 강력하게 주장해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양보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당선을 축하하는 술자리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후배가 시인 옆에 앉는 영광을 누렸던 것은 다른 자리였을 것이다.

누구의 기억이 맞을까? 이처럼 동일한 사건에 대해 두 사람의 진술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대개는 두 진술 모두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부분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릴 것이다. 그러나 진술이 서로 엇갈리는 부분에 주목하고 그 작은 불일치에서 숨겨진 진실을 찾으려고 할 수도 있다. 사실은 공통된 것 속에, 진실은 불일치 속에 있다.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은 부정확하겠지만 내가 직접 두 눈으로 읽은 책에서 인용하는 구절은 그래도 정확하지 않을까? 얼마 전 나는 남녀의 포옹을 그린 이강훈 작가의 그림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투르니에가 그랬죠. 뱀은 키스와 포옹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는데 그것은 곧 여자가 남자를 죽이는 방법과 같다고. 그림 정말 아름답네요.”

기억은 틀렸다. 책장에서 미셸 투르니에의 『예찬』을 찾아 확인해 보니 전혀 다른 글이다. 여자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투르니에가 쓴 글은 이랬다. “뱀에는 독이 있는 뱀과 목을 감는 뱀, 두 종류가 있다. 독이 있는 뱀은 키스로 죽인다. 목을 감는 뱀은 포옹으로 죽인다. 전자는 온통 입뿐이다. 후자는 온통 팔뿐이다. 그러나 양자가 다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죽인다.”

나는 왜 원문에는 들어 있지 않은 “여자가 남자를 죽이는 방법과 같다”라는 문장을 내 멋대로 넣어 기억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여성에 대한 나의 편견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감추고 싶은 내 컴컴한 무의식이나 욕망이 뱀처럼 엉켜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인간의 진실은 다름 아닌 그가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한 이는 앙드레 말로다. 기억은 은밀하고 위대하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 은폐와 생략과 왜곡과 편집을.

그런데 정말 앙드레 말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을까?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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