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살의 품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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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30면

아저씨라는 호칭에는 은근한 경멸과 혐오의 뉘앙스가 있다. 마치 아줌마라는 호칭처럼.
나는 집에서는 아빠나 남편이고 회사에서는 부장이다. 그러니 내가 아저씨로 불릴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은 집과 회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까. 집과 회사를 벗어난 바깥 세상에서 나는 아저씨다. 사람들이 나를 아저씨로 보며 아저씨라고 부른다. 심지어 집에서도 아저씨라고 불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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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전등 좀 갈아달라고 말한 게 언젠데 아직도 안 간 거야. 난 어두침침한 거 질색이란 말이야.” 남편은 아내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책장을 넘긴다. “아저씨! 책 좀 그만 봐요.”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에는 물론 남편의 행동을 비난하는 아내의 분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남편이란 인간을 잘 모르는 남자처럼 객관화해서라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아내의 안타까움도 묻어 있다. 그 안타까움을 모르는 남편은 아내에게 가서 아내의 아저씨가 된다. 쩨쩨한 아저씨가. “알았어, 아줌마.”

집을 나서면 나는 아저씨다. 세상은 여름이 한창이다. 여름은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계절이다. 옷 속에 있던 살도 세상 밖으로 앞다투어 뛰쳐나온다. 그렇게 뛰쳐나온 살이라고 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살은 아저씨 관람 불가다. 이럴 때 나는 긴장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아저씨 소리를 듣는다. “아저씨, 어딜 봐요?” 엉큼한 주책 아저씨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이가 들면 나는 저절로 훌륭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마음도 넓어지고 생각도 깊어지고 욕심에서도 벗어날 줄 알았다. 남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게 엄격해질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나이가 들어 결국 내가 된 것은 아저씨다. 원빈의 아저씨가 아니라 편협하고 고루하고 쩨쩨하고 욕심 많은 아저씨.

아저씨는 피로하다. 젊었을 때는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거웠는데 요즘은 점점 어렵게 느껴진다. 금세 피로해진다. 아저씨는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도넛 가게에 앉아 다다 도미오의 『면역의 의미론』을 읽는다. 우리의 면역계는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를 구분해 비자기를 배제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에 착오가 발생하면 병에 걸린다. 가령 비자기를 자기로 착각하면 암에 걸리고 자기를 비자기로 혼동하면 당뇨나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린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자기가 작아진다. 웬만한 것은 모두 비자기로 여겨 배제한다. 새로운 경험과 타인의 존재는 그저 피곤할 뿐이다. 만일 낯선 존재가 접근하면 허약한 마음은 알레르기성 질환처럼 ‘꼰대’의 발작을 일으킨다. 마음의 면역력을 길러야겠다. ‘신사의 품격’은 지키지 못하더라도 ‘아저씨의 품격’은 지켜야겠다. 그때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자기야.”
고개를 돌리니 예쁜 아가씨가 나를 보며 웃는다. 뭔가 착각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조심스럽게 확인한다. “저 말인가요?” 착각이 아니다. 옷 바깥으로 살이 마구 뛰쳐나온 아가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요, 안 쓰시면 의자 하나 가져가도 괜찮죠?”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는 것보다 자기와 저기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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