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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문학적 축구경기 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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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마 전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다녀왔다. 라이프치히는 본래 인쇄와 출판의 도시로 유명했지만 전후에는 동독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 명성에 값하지 못했다. 그러나 통독 이후 서서히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압도적인 데가 있었다. 1000회에 가까운 행사가 쉴새없이 벌어지는 거대한 전시관은 독일 전역에서 몰려든 작가들과 그들을 보러온 독자들로 북적였다.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걸어다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출판사와 저작권 에이전시들이 주인인 상업적.국제적 도서전이라면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작가와 독자들이 주인인 정서적 도서전이었다.

우리나라는 독일의 유수 출판사들의 부스가 몰려 있는 전시관 4홀의 중앙에 큼직한 부스를 마련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벌였다. 우리 작가들은 그곳에서 독일 작가들과 문학에 대해 토론하거나 자기 작품들을 낭독했다. 그리고 동시에 바이마르나 예나, 드레스덴 등 근처 도시로도 이동해 낭독회를 했다. 모여든 청중은 진지했고 행사는 성공적인 편이었다. 이번 행사는 독일에 한국 문학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참여한 작가들은 유럽 문학의 본산지에서 벌인 일련의 활동을 통해 어떤 자신감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터뷰가 몰려들었고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운 편이었다. 한국 여성들의 목소리를 궁금해하는, 소설을 통해 그것을 들어보려는 흐름도 감지할 수 있었다.

"왜 한국 문학이 독일에 소개돼야 하느냐"고 한 기자는 물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덧붙여 말했다. 우리 작가들은 동양의 고전부터 서양의 최신작, 남미 문학까지 다 읽는다. 그런데 유럽의 작가와 독자들은 거의 유럽 문학만 읽는다. 이래서야 어떻게 유럽 문학이 지금의 매너리즘을 뚫고 나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난 시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치열하게 써왔고 현재도 자국의 영화, 인터넷의 광풍과 싸우며 쓰고 있다. 자국 영화가 점유율 50%를 오르내리는 나라는 흔치 않다. 따라서 소설가가 자국의 영화와 경쟁해야 하는 나라는 무척 드물다. 뿐만 아니라 휴대전화와 초고속인터넷 보급률에서 세계적으로 수위를 다투는 나라에서 책이라는 지극히 전통적인, 무겁고 비싼 미디어로 맞서고 있다. 전 세계의 작가들은 한국 작가들이 어떻게 쓰고, 또 어떻게 살아남는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전 세계의 문학이 앞으로 겪을 일들을 앞서 감당하는 잠수함의 토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는 독일 문학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의 문학을 모른다. 그렇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지피지기하는 우리와 그렇지 못한 유럽 문학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기자들은 또 물었다. "한국의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어떤 작가들은 이렇게 반문했다. "왜 여러분은 한국 작가만 보면 통일에 대해 묻느냐"고. 그들에게 우리나라는 휴전선과 북핵, 시위와 정치적 격변으로 기억돼 있다. 그것은 물론 일견 정당하지만 이미 우리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속속들이 세계화돼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고민하는 모든 문제를 우리도 함께 고민하고 있다. 우리 역시 실업과 가난, 소외와 단절,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음악, 똑같은 영화, 똑같은 패션을 소비하고 있다. 우리의 작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쓰고 있다.

"과거의 독일 문학이 위대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로만 팀을 짜서 일종의 문학적 축구경기를 벌인다면, 우리가 꼭 진다고는 말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했다. 이런 공언이 만용으로 치부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김영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