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살리자] 일본서 배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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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20세기의 마지막 10년간 소비침체로 인한 불황을 혹독하게 겪었다.

일본은 1980년대 말 거품경제가 가라앉자 극도의 소비억제로 치달았다. 주식과 부동산 값이 폭락해 재산을 날린 개개인들은 장래에 대비하기 위해 거의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저축을 늘렸다. 가뜩이나 '저축=선, 소비=악' 이라는 전통적 인식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이었다.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60%를 차지하는 민간소비가 얼어붙자 경기는 더욱 바닥을 헤맸다. 기업은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아 쓰러졌고, 개인은 실업에 대한 불안감으로 더욱 소비를 줄였다. 기업의 투자도 위축돼 저축은 늘 과잉상태가 됐다.

과잉저축은 경상수지 흑자를 확대시켰고 이는 다시 엔고를 부추겼다. 불황 속의 엔고는 일본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약화시켜 불황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는 악순환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97년엔 불황에 따른 세수감소를 보완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하는 바람에 소비를 더욱 위축시키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쯤되자 정부가 과잉저축을 막기 위해 금리를 내려도 사정이 개선되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금리가 떨어지면 저축의 매력이 떨어져 소비가 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줄어든 이자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저축총액을 더 늘리는 '금리의 역설' 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예컨대 지난해 가장이 70세가 된 일본인 가구의 평균저축 잔고는 약 2천만엔으로 1년새 1백70여만엔이 늘어났다. 불황으로 소득이 줄어들고 금리가 낮아졌는데도 저축액은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초 소비를 진작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지역진흥권(상품권의 일종)도 효과를 못 봤다.

사람들이 꼭 사야 하는 생필품을 구입하는 데만 사용하는 바람에 오히려 저축만 늘었을 뿐 추가소비를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이같은 경험을 토대로 일본 정부는 최근 소비를 자극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개개인의 지갑을 억지로 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대책의 초점은 금융구조조정.규제개혁 등을 통해 장래의 불안감을 불식시켜 '저축 강박관념' 을 누그러뜨리는 쪽으로 맞춰지고 있다.

개개인에게 "경제가 다시 잘 돌아가고 있으니 이제는 돈을 써도 되겠구나" 하는 안정감을 심어주자는 것이다.

기업들도 속속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소비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게임기).아이보(로봇 애완견), NEC의 밸류스타(PC)등이 대표적이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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