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떠받치고 선 물푸레나무의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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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푸레나무의 신화

▶우주를 떠받치는 거대한 우주목

아이슬란드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스노리 스튀를뤼손의 역작 '에다'에는 세계의 축인 동시에 버팀목인 이그드라실(Yggdrasil)이라는 거대한 물푸레나무의 신화가 있습니다. 이 신화에서 물푸레나무는 '이그드라실'이라는 이름을 갖고 나와요.

신화 속의 이그드라실은 모든 나무들 가운데 가장 크고 훌륭한 나무입니다. 이그드라실은 온 세상과 하늘까지 가지를 뻗어 올려 세계와 우주를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과 사뭇 비교되지 않아요? 그리스의 아틀라스가 맡았던 역할을 북유럽에서는 물푸레나무인 이그드라실이 맡은 것이에요.

이처럼 거대한 나무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는 믿음은 인도-유럽어를 쓰는 문화권에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우주목 신화가 바로 그것이지요. 어떤 종족들은 언덕 위에 아주 커다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부근을 신성한 곳으로 섬기기까지 했답니다.

▶신-거인-인간에 닿은 세 개의 큰 뿌리

이그드라실에는 엄청나게 큰 세 개의 뿌리가 있었어요. 첫 번째 뿌리는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 안에 박혀 있었고, 두 번째 뿌리는 인류 이전에 있었던 선사시대 거인의 집에, 세 번째 뿌리는 죽은 사람이 머무르는 곳인 니플하임에 닿아 있었어요. 즉 신과 거인 그리고 사람의 세계를 모두 통괄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뿌리에는 각각 다른 샘이 있어 이그드라실의 생명을 지켜주었답니다. 신들의 세계에 닿아있는 첫 번째 뿌리 근처에는 '운명'이라는 뜻을 가진 위르드 신이 지배하는 운명의 샘이 있었고, 거인의 세계에 닿은 두 번째 뿌리 근처에는 지식과 신비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미미르의 샘이 솟아나고 있었어요. 죽은 사람의 세계로 뻗어나간 세 번째 뿌리 근처에는 대지에 물을 공급하고 인류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는 모든 생명의 원천인 흐베르겔미르 샘이 있었어요.

신과 거인과 사람, 그리고 운명과 지혜와 생명의 샘으로부터 숨길을 받아 자라고 있는 물푸레나무의 줄기가 지상으로 떠오르면 그 줄기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중간층으로 인간들이 사는 곳인 미드가르드를 가로지르게 되며, 그 나무의 꼭대기는 신들의 천상 거주지인 아스가르드에까지 닿게 됩니다. 모든 생명과 문명의 원천인 셈이지요.

▶북유럽 신화의 최초의 신 '오딘'

우주목 '이그드라실'을 배경으로 우리는 '오딘'이라는 신을 만나게 됩니다. 고급 시계 브랜드로 '오딘'이 쓰인 적도 있지요. '오딘'은 북유럽 신화 중 가장 오래된 최초의 신이며, 모든 신들의 아버지이자 사람을 창조한 신입니다.

옛날 북유럽 사람들은 해와 달을 떠오르고 지게 하는 것도 오딘이며, 낮과 밤을 지배하고 세상의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것도 오딘이라고 믿었습니다. 처음에 오딘은 전쟁의 신이었지만, 나중에는 지식과 신비로운 지혜의 신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 변신의 과정에 물푸레나무의 역할이 있습니다.

전쟁의 신이었던 오딘은 숱하게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더 많은 마술적 힘을 얻고자 세 차례의 수난을 자청해 겪습니다. 그 중 세 번째 수난이 곧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에 매달려 아홉 낮, 아홉 밤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오딘이 힘을 얻기 위해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에 매달려 아홉 낮과 밤을 보낸 까닭에 물푸레나무에는 '오딘의 준마'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딘은 이 의식을 통해 최상의 지식 즉 또 다른 세계의 신비한 언어인 룬 문자(주로 마술적인 목적으로 쓰인 고대 북유럽의 표음문자)를 얻고 지혜의 신으로 변신하게 되지요.

얼마 후 신들의 세계에도 위기가 찾아 옵니다. 신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죄를 쌓았던 까닭에서입니다. 마침내 신들의 세계를 환히 비추던 태양은 빛을 잃게 됐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오딘은 난국을 타개할 지혜를 얻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물푸레나무의 뿌리가 닿아 있는 미미르의 샘을 찾아 갑니다.

▶물푸레 나무로 빚어낸 사람

그러나 오딘은 신들의 세계를 구하는 데에 실패합니다. 신들의 세계에 곧바로 종말이 찾아오고,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의 숲만이 오롯이 살아 남습니다. 새로운 태양이 다시 솟아오르면서 죽은 신들이 부활하고, 폐허가 된 대지를 편력하고 돌아온 오딘은 물푸레나무 숲에서 한 쌍의 남녀를 탄생시킵니다.

먼저 물푸레나무 밑둥에서 만들어낸 남자를 만들어 '물푸레나무'에서 딴 이름 '아스크르'라 불렀고, 느릅나무를 뜻하는 '엘므라'에서 딴 이름으로 여자 '엠블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아침에 핀 장미를 양식으로 하여 살아가는 그들이 곧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는 거지요. 흙에서 태어났다는 그리스도교의 신화와 달리 나무에서 사람이 태어났다는 생각은 우주목 신화를 갖고 있는 인도 유럽 어족 문화권에 일반적인 것이랍니다.

굴참나무 허리에 반쯤 박히기도 하고
물푸레나무를 떠받치기도 하면서
엎드려 있는 나무가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싱거울까
산짐승들이나 나무꾼들 발에 채여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묵밭에 가서 처박힌 돌멩이들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 신경림, '겨울 숲'에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지켜 온 물푸레나무

우리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물푸레나무는 우리를 키워 준 회초리이면서 또한 우리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우리를 지켜 준 무기이기도 했습니다. 물푸레나무는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일찍 거둬들여야 했지요. 물푸레나무는 또 시인들에게는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단아한 이미지를 갖추기도 했지요.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곁에서 물푸레나무는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고 가꿔주는 강인한 나무로 남아 있을 겁니다.

〈물푸레나무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다음 호에는 우리의 고향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고규홍(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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