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주장하면 좌파고, 재벌 잘한 점 칭찬하면 삼성 응원단이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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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국 사회의 좌·우 진영이 한목소리로 나를 비판하고 있다. 내가 주장해온 사회적 대타협의 밀알이 된 듯하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한 이 말 속에는 풍자가 짙게 녹아있다. 대립하던 한국 좌·우파가 장 교수를 상대하기 위해 같은 편이 됐으니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진 것 아니냐는 얘기다. 이런 그의 풍자와 반어법 덕분에 무거우면서도 뜨거운 인터뷰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책 얘기를 먼저 하고 싶다. 장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얼마나 팔렸나.
“40만 권 가까이 팔렸다고 하더라. 경제학 책 치고 많이 팔렸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반응이 뜨거운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안을 찾는 욕구가 한국 국민 사이에 퍼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미국처럼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서 한국 국민이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많이 받아들였다. ‘부자 되세요!’가 인사말이 될 정도였다. 어느 나라에서 ‘부자 되세요!’가 인사말로 쓰이는가.”

-대중의 반발 때문이란 말인가.
“한국 국민은 외환위기 이후 시장주의를 받아들여 열심히 경쟁하고 노력하면 다 부자가 될 줄 알았다. 이른바 스펙(학벌·토익 점수 등) 쌓기도 치열하게 했다. 결과는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옛날보다 경제 성장도 못하고 청년실업은 심각하다. 대중이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하며 대안을 찾아나선 바람에 내 책이 잘 팔린 것 같다.”

국제 전화 인터뷰의 어색함은 판매부수 이야기로 많이 누그러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쟁점을 놓고 이야기할 때가 됐다.

-좌파인가, 우파인가.
“글쎄…. 좌·우를 나누는 기준이 아주 복잡하다. 나라마다 다르다. 너무 단순화한 것일 수 있지만 ‘정부 개입 vs 시장 자유’를 기준으로 보면 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좌파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기준으로 보면 어떤가.
“‘급진적인 변화 vs 점진적 개혁’이란 잣대가 있다. 나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니 우파다. 마지막으로 ‘자본 편인가 vs 노동 편인가’를 기준으로 보면 나는 양쪽이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중도파다. 이 나라에선 좌파인 사람이 저 나라에선 우파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국 좌파는 중앙은행 독립을 중시하는데 영국 좌파는 그렇지 않다.(※영국 노동당 정권은 민간 대형은행으로 중앙은행 역할을 하던 영국은행을 1946년 국유화했다) 영국 우파는 정부가 산업정책을 펴는 것을 좌파적이라고 얘기하는데, 한국이나 프랑스에선 우파가 산업정책을 편다.”

-어느 한 쪽을 분명히 편들지 않아서인가. 좌·우 동시에 장 교수를 비판하고 있다.
“딱지 붙이기식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좌파는 이러해야 하고, 우파는 저러해야 한다’는 식에 익숙해 있다. 군사독재의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의 폐해다. ‘장하준, 저 사람은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서 좌파인데, 재벌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니 삼성 응원단 아닌가’ 하는 식이다. 억지로 자신들이 정한 틀에 넣으려 한다.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아주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좌·우 공격을 받으니 외롭지 않은가.
“(웃으면서) 40만~50만 독자들이 성원해주는데 외롭기는…. 정치인이 되거나 기업에 들어가면 동의하고 싶지 않아도 조직의 논리상 동의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대로 하기 위해 학자의 길을 택했다. 다수파에 꼭 속하고 싶었으면 이런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좌·우파가 한 사람을 놓고 동시에 공격하는 게 한국 경제학계에선 처음이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럴 것이다. 내가 평소 사회적 대타협을 자주 얘기했는데 이번에 기틀이 마련된 듯하다.”

-무슨 의미인가.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참여연대가 공동의 적(장하준)을 찾지 않았는가. (웃음) 내가 그런 사회적 대타협의 씨(밀알)가 되기만 한다면 욕먹어도 좋은데….”

-아쉬운 점이 있다는 말인가.
“우파는 시장주의자의 옳은 길을, 좌파는 진보주의자의 옳은 길을 미리 정해놓고 있다. 나는 어느 쪽에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계속 불편해 한다. 그러다가 내 새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러니까 (좌·우 모두)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그렇게 비판하고 나서는 것 같다.”

-책이 논란이 되면 좋은 일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내 책 이야기를 해준다는 게 어찌 보면 좋은 일이다. 좀 아쉬운 점은 오해나 곡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열고 다가오면 ‘어느 정도는 네 말이 맞다’고 능히 말할 수 있는데, 참여연대 쪽은 ‘장하준 이 사람은 주주자본주의를 반대한다니 우파다’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러곤 ‘재벌 편’이란 딱지를 붙힌다. 이런 풍토가 좀 섭섭하다. 박정희 모델의 순기능을 말했다고 그가 사람을 잡아 가두고 고문한 것까지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 장 교수 전화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학자로서 비판에 의연하게 대응하려고 하지만 마음의 상처에서 자유롭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는 이렇게 일갈한다.

“시장주의자를 자임하는 전경련이니 자유기업원이니 하는 곳이 ‘이 책이 인기 있다고 다 맞는 게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그 사람들은 ‘시장은 항상 맞다’고 말하는데, 시장이 최고의 책으로 쳐줬다면 자기들도 맞다고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처럼 시장이 항상 맞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시장에서 인기 있다고 이게 옳은 이야기는 아니다’고 할 수 있지만…. 너무 ‘이 사람이 싫다’에 사로잡혀 자기 모순적인 것을 보면 서운하기보다는 서글프다.”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국내 좌·우 진영이 『…23가지』 가운데 사실관계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대목을 물었다. 이내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좌·우파 모두 미국 자동차회사가 주주이익만을 중시해 망했다고 한 장 교수의 주장이 틀렸다고 한다.
“GM의 파산 원인은 여러 가지다. 노동조합 문제도 한 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수백억 달러를 자사주 매입에 써 연구개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주주가치 경영의 전도사라는 잭 웰치 GE 전 회장이 주주자본주의 해악을 인정하고,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아이디어’라고 했는데 더 말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한 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여러 원인 가운데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나.
“FTA가 자유무역은 아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자유무역에 가깝다. 경제 체력이 비슷한 나라끼리 FTA를 하면 아주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유럽 통합 초기에 경제 체력이 비슷한 나라들이 자유무역을 해 효과를 봤다. 하지만 한·미 두 나라는 경제체급이 다르다. FTA를 하면 한국의 어떤 산업은 죽을 수도 있다.”

-우파들은 장 교수가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고 비판했다. 그 예가 과거 미국 등의 보호무역 문제다.
“19세기 보호무역이 효과가 없었다고 하는데, 반대의 연구 결과도 많다. 무엇보다 그들은 지금까지 미국이 보호무역 정책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증거를 들이대니 이제는 ‘보호무역 정책을 썼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장 교수가 아프리카가 신자유주의 개혁 때문에 궁핍해졌다고 주장하면서 경제 데이터를 자의적으로 인용했다는 비판도 있다. 수치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80~90년대 아프리카 1인당 경제 성장률은 -0.7%였다. 2000년대에 성장이 재개되었지만 이를 합쳐도 최근 30여 년간 성장률은 연평균 0.2%에 지나지 않았다. 아프리카 정책 담당자들이 지난 30년간 시장화한다고 온 대륙을 들쑤셨는데도 결국 제자리걸음만 했다는 게 학계에선 정설이다.”

-장 교수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스토리텔러(이야기꾼)라는 지적도 있다.
“나를 비판하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말한다. 내가 대중적인 책만 쓴 게 아니다. 논문 100여 편을 발표했다. 논문 내용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그 논문을 없는 것으로 슬쩍 몰아놓은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연구 방법의 차이도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전제를 세우고 수리 모델을 만든 다음 통계학으로 검증하는 게 유일한 경제학 연구방법이라고 한다. 나는 역사적 사실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살펴 이론을 구축해 가는 스타일이다. 자기들과 다른 방법론을 무시하는 태도는 아주 편협하다.”

-마지막으로 장 교수가 꿈꾸는 경제는 무엇인가.
“균형 또는 중용을 갖춘 경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유무역의 한계가 있다고 해서 자유무역이 나쁘다고 한 적 없고,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시장을 없애야 된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처럼 노동자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해본 적도 없고, 극단적인 시장주의자처럼 모든 게 자본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느 점에서 구성원이 타협해 균형이나 중용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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