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빈 삼각(흑115)의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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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제10보 (115~125)]
黑 . 이세돌 9단 白.구리 7단

우상에서의 백의 도발은 흑▲라는 기상천외의 묘수로 제압되었다. 그러잖아도 유리했던 흑은 이제 배가 부를 지경이다. 옥죄던 긴장은 스르르 풀리고 잠시 몸을 눕히고 싶어진다. 이세돌9단에게 승부의 마(魔)라 할 방심에 빠져들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구리(古力)7단은 울고 싶은 심정이다. 마주앉은 이세돌9단에게도 구리의 갈가리 찢긴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백△가 스르르 놓인 것은 바로 이때다. 척 봐도 별것 아닌 수. 지나는 길에 아무 뜻 없이 한점을 살리는 그런 수….

▶ 참고도

이세돌은 '참고도'흑1로 넘어가려다가 문득 이상한 예감에 잠시 손을 거둔다. 이세돌 특유의 동물적인 본능이랄까, 뭔지 모를 위험신호가 뇌리를 스친 것이다.

이세돌은 늘어진 신경을 다시 추슬러 수를 본다. '참고도'흑1로 붙이면(그게 연결의 일반적 감각인데) 백2로 젖히는 수가 있다. 3으로 끊으면 4와 6의 돌파. 7로 절단하면 백돌은 우수수 잡히지만 이때 백8로 뚫는 수! 이 수에 흑은 꼼짝없이 걸려들지 않는가(A로 막으면 B의 절단).

머리끝이 쭈뼛 서는 수다. 우하 흑 석점이 잡히면 천신만고 끝에 건설한 흑의 왕국은 일거에 무너지고 승부는 역전된다. 이세돌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115라는 빈삼각의 묘착을 찾아낸다. 검토실에선 크게 우세한데도 또 다시 우형(愚形)의 강수를 두는 이세돌에게 "지독하다"고 혀를 내두르고 있었지만 사실 115는 본의 아닌 강수였고 궁여지책이었다. 구리의 희망은 115에서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구리는 아직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처입은 맹수처럼 그는 116,120 등으로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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