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예술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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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10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근사한 일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미술시간이면 선생님에게 늘 칭찬받고, 학교 대표로 사생대회에 나가 상도 여러 번 받은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미술에 소질이 있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그림을 그렸지만, 막상 진학할 때는 미대를 선택하지 않고 미술을 취미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멋진 일이다. 만약 당신이 수시로 가구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좋아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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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가구 위치가 바뀌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싫어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쫓아가려다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멀미를 하면서도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들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구 같은 것. 집에 돌아와 나는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가구를 보며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일상의 예술가인 아내는 다르다. 아내는 수시로 가구 위치를 바꾼다. 우리 집의 어떤 가구도 제자리를 지킬 수 없다. 그것들은 안방에서 거실로, 아이들 방으로 계속 자리를 옮겨 다녀야 한다. 아내에게 가구는 물이나 돌인지 모른다. 한곳에 고여 있으면 썩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구르지 않으면 이끼라도 끼는 것처럼, 아내는 가구를 수시로 옮긴다.

일상의 예술가와 함께 사는 일은 근사한 일이다. 반복되는 삶의 순간들을 새롭고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상의 창조자와 함께 사는 일은. 그것은 어느 날 문득 작은 정원으로 바뀐 베란다를 발견하는 일이며, 소파 위에 걸쳐진 천에서 기하학적 무늬를 만나는 일이고, 잠자리에 들면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붙잡은 ‘결정적 찰나’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일이다.

퇴근하고 집으로 오는 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집 문을 열기도 전에 어떤 강렬한 냄새가 둔한 내 코를 자극한다. 문을 열자 페인트 냄새가 진동한다. 그때서야 아내가 며칠 전에 한 말이 기억났다. 집의 색이 좀 지루하지 않으냐고, 발랄한 색으로 바꾸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문과 문틀의 색만 바꿔도 집안 분위기가 훨씬 생기 넘치지 않겠느냐고. 아내가 말했을 때 나는 그걸 건성으로 듣고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했던 것인데 아내는 벌써 실행에 옮긴 것이다.

생각이 떠오르면 행동으로 바로 옮기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멋진 일이다. 만약 당신이 페인트 냄새를 좋아한다면 말이다.창과 문을 모두 활짝 열고 욕실의 환풍기와 부엌의 팬을 다 켜도 냄새는 빠지지 않는다. 페인트 냄새 때문에 잠은커녕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 내가 혹시 유난히 그런 것에 민감해 그런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어릴 때 기름이 길에 떨어져 있으면 쪼그리고 앉아 그 냄새를 맡곤 했을 정도로 화학 냄새 친화적 존재다. 그런데 이건 머리가 깨어질 것처럼 아픈 것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마침 아내에게 전화가 오자 나는 화학적으로 짜증을 부린다. 아내는 페인트 냄새 갖고 뭐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코웃음을 친다.
“집에 오면 직접 냄새를 맡아봐. 잠을 잘 수 있는지 없는지.”
“나 지금 농성장인데 회의 있어서 집에 못 들어가.”
나도 오늘 밤 철야농성을 해야겠다.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집에서.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스스로 우유부단하고 뒤끝 있는 성격이라 평한다. 웃음도 눈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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