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불황탈출 마지막 카드 엔低 쓸까 말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도요타 1조1천억엔, 혼다 6천4백억엔, 닛산 4천9백억엔.'

일본 자동차 3사의 2001회계연도(2001년 4월~2002년 3월)의 성적표(영업이익)는 화려하다. 전년 대비 평균 성장률 51.6%. 도요타의 1조엔 영업이익은 경제대국 일본에서도 처음이다.

하지만 이같은 성적표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선은 따갑다. 엔저(円低)로 실력 이상의 '횡재'를 한 것으로 보기 때문.지난해 엔화는 달러당 1백25엔으로 2000년보다 15엔(12%) 떨어졌다. 엔화 약세로 3사가 '거저 얻은'이익이 7천9백억엔(전체의 35%)에 이른다.

그럼에도 엔화가치가 더 떨어져야 한다는 전문가들이 있다.1백40엔대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은데 일부에선 1백70엔,2백엔까지 주장한다.

"엔화는 고평가돼 있다. 지금처럼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엔저는 필연이다. 주변국들이 싫어하고 두려워한다고 신경쓸 필요 없다."(니시무라 요시마사 와세다대 교수)

상장사의 지난해 성적표를 보면 일본이 왜 엔저에 매달리려 하는지 알 수 있다.3백75개 제조업체의 영업이익은 2000년 8조엔에서 지난해 3조엔으로 62.3% 감소했다. 정보기술(IT)불황에 구조조정 비용도 컸다지만 투자자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나마 '엔저 효과'가 없었다면 이익은 더욱 줄었을 것이다.

엔화 약세를 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해서다. 엔화가 약세면 수출이 늘어나고, 수출이 증가하면 기업이 살고 일자리가 늘어난다. 일자리가 증가하면 소비가 늘고….경기 회복과 디플레 극복의 환경이 갖춰진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은 불황을 이겨내려고 쓸만한 정책은 거의 동원했다.정부는 나라빚이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설 정도로 재정을 투입했고 금리는 제로(0)수준으로 낮췄다. 그래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엔저를 마지막 카드로 생각하는 부류도 등장한 것이다.

물론 엔저 정책도 새로운 게 아니다. 마이너스 성장에 짓눌린 95년 4월 일본은 선진 7개국의 합의 아래 엔화를 달러당 80엔대에서 1백엔대로 끌어내린 적이 있다. 97년 4월 엔화는 1백26엔까지 떨어졌고 그 여파로 연속 플러스 성장을 이뤘다.

일본은 환율 변화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달러당 2백50엔을 넘나들던 엔화가 85년 9월 플라자합의 직후 1백30엔까지 올라가는 극적인 상황도 겪었다. 80년대 엔고를 기술력으로 극복했다면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엔저를 통해 경기를 일으키려 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다고 일본이 엔저 정책을 강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주변국들의 반발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일본 무역수지가 계속 흑자를 기록하자 다이샹룽 중국 인민은행장은 "위안화의 변동폭을 확대시킬 수도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일본 내부에서도 엔저정책 무용론이 있다.

"엔저는 디플레 해소에도 도움이 안된다. 디플레를 해소하려면 계산상 2백엔은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다. 엔화 가치가 일정 선 아래로 떨어지면 일시에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현 상황에서 환율정책은 매우 위험하다."(후카오 미츠히로 게이오대 교수)

그래도 일본 정부는 어느 정도 엔화 약세 기조를 유지하려고 든다. 지난 22일 달러당 1백25엔을 기록하자 일본은행은 외환시장에 개입했다. 엔화가치가 더 오르면 곤란하다는 의지를 시장에 보인 것이다.

<특별취재팀>

김정수·김수길·양재찬 전문기자

남윤호 도쿄특파원

이재광·신예리 경제연구소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