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퇴출시킨 68년 유럽의 5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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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와 위계질서여, X 먹어라! 그것이 바로 1968년 5월이 내게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넬리 핀키엘스텐, 68혁명 당시 파리 낭테르대 학생) "결코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억압된 감정을 해방시켰으며, 그날 밤으로 인해 나는 영원히 역사에 대한 낙관을 가지게 됐습니다."(학생 시위 지도자 다니엘 콘 벤디트)

『1968년의 목소리』(원제 A Student Generation in Revolt)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딱한번 있었던 동시적인 세계 격변(역사학자 홉스 봄)인 68혁명을 재구성한 싱싱한 저술이다. 추상도 높은 역사서술과 달리 혁명에 참여했던 대학생·청년 2백30명과의 집단 인터뷰에 토대를 둔 구술(口述)역사(oral history)로 꾸며졌기 때문이다. 읽어내기 부담이 없고, 현장의 분위기가 물씬해서 이렇게 말하는게 좋을 듯싶다. "쉬 실체가 다가오지 않았던 68혁명에 씌워져 있었던 커튼 한 자락을 확 걷어내 버린 느낌".

미국 좌파학자 에마누엘 월러스틴의 말로 "1948년 혁명과 함께 단 두개뿐인 세계혁명"인 68혁명은 프랑스 드골 정부에 항의해 벌인 파리 학생 시위가 시발이다. 총 4백만명의 파업으로 연결됐으며 프랑스를 비롯한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북아일랜드 서구 6개국에서 대규모 시위로 단박에 번졌다. 무엇이 기성질서에 반항하는 대폭발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오늘날 서구사회의 변화된 얼굴을 만들어냈을까.

이 책은 학생시위의 추이나 시간표 작성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건 책 뒤편의 촘촘한 연대기로 대신하고,'1968년의 사람들'의 속마음과 성장배경 추적에 힘을 준다. '유럽 68세대 연구'라 해도 문제없겠다는 판단은 그 때문이다. 전체를 취합한 사람은 한명이지만, 유럽의 주요학자 9명의 인터뷰 참여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단일 저작으로 대표성도 있다. 책은 시종 이렇게 묻는다. "의회 민주주의가 외양상 순조롭고, 한국전쟁 특수로 서구 일부 국가들은 전후 10년새 국민총생산을 세배까지 늘리는 풍요 속에서 왜 혁명이 터져나왔을까? 특히 '유예된 세대'로 눌려 있던 전후 베이비 붐 세대 젊은이들이 변화된 시대에 어떤 새로운 욕망을 분출하려 했을까?"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50년대 냉전 속 유럽은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권태가 사람들의 머리를 짓눌렀다. 쿠바 미사일 위기 속에서 핵 절멸의 집단적 공포에 사로잡혔고, 이때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핵 군축 캠페인에서 용기를 얻어 "권위주의여 X 먹어라!"고 외칠 수 있었다. 알제리 전쟁· 베트남전 반대투쟁이 불붙었고, 미국의 민권운동도 고개를 들었다. 여성주의도 선보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모델과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공간도 탐색됐다. 초기 신좌파의 등장이 그것 아니던가?

즉, 68혁명은 2차 대전 이후 드골 정권 같은 권위주의의 망령을 휘청거리게 하면서 오늘날 시민사회로 불리는 부문을 일군 해방의 공간이었다. 19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모델과 또 달랐던 이 격변으로 권력-시민부문은 물론 다수인종-소수인종, 남성-여성 사이의 지배종속의 관계가 예전 같지는 않게 변했다. 강대국-제3세계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떠오르는 이미지는 유럽의 오늘은 68혁명 때 그린 큰 그림이라는 확인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68혁명은 지구촌 전체가 탈 모더니티 쪽으로 문명의 물꼬를 튼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물론 19세기 혁명처럼 권력쟁취도 없었고, 때문에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지적되지만, 19세기 혁명 못지않은 결과를 이끌어낸 인류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된다.이 세계사적 폭발 속에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의회 민주주의, 정부의 권리,자본의 지배, 대학 행정당국, 그리고 위계질서가 분명한 가족, 남녀 사이에 냉전적 관계였던 섹슈얼리티, 부르주아적 가치의 신성함 등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4백83쪽 요약).

그런 점에서 이 책은 20세기 서구문화 변혁사로 읽히기도 한다. 풍요 속의 억눌림인 냉전(2부),소비문화·록 음악·성해방·약물·민권운동의 징후(3부),68혁명의 전개와 유산 분석(4,5부)의 서술이 그렇다. 나머지 장은 '여진(餘震)'분석이다. 붉은 여단(이탈리아)적군파(서독) 등 테러의 분출, 협동조합운동·동성애자 운동에 할애되며, 제8부 회고에서는 혁명 때 제기됐던 제국주의·인종주의·성차별 등의 사안은 아직도 유효함을 확인하고 있다.

한국사회에 주는 강렬한 암시의 대목도 특히 눈에 띈다. 80년대 후반에 출간된 이 책은 놀랍게도 2000년대 초입의 이 한국사회가 68혁명 당시 서구 분위기와 너무도 흡사함을 보여준다. 전근대-근대-탈근대가 엉켜 있는 '삼겹살 한국사회'의 모순이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되지 않을 경우 폭발현상도 배제 못한다는 살아있는 교훈을 준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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